우크라 전쟁 이후의 세계질서
러 침공으로 안보문제 현실화… 신냉전 체제 수면위 떠올라
美-EU, 금융제재 강공하자, 러는 핵 위협하며 맞불작전
국제질서 주도권 양보없는 대결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이 어떻게 전개될지 한 치 앞을 알 수 없다. 개전 초기 우크라이나 저항에 주춤한 러시아는 부대 추가 투입, 민간지역 무차별 공격, 헤르손 점령과 자포리자 원자력발전소 장악 등 공세 수위를 높이고 있다. 지난달 26일 미국과 유럽연합(EU)은 ‘금융 핵폭탄’에 해당되는 국제은행간통신협회(SWIFT·스위프트) 결제망에서 러시아를 배제했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도 핵무기 운용부대에 특별 전투임무 돌입을 지시했다. 제재와 무력이 ‘금융 핵’ 대 ‘진짜 핵’ 양상의 강(强) 대 강(强) 충돌로 이어지고 있다. 협상도 하고 있지만 우크라이나 전쟁은 치킨게임 성격을 띤 채 어떻게 전개될지 불투명하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2월 24일은 유럽을 비롯해 세계질서 재편을 촉발한 역사적 전환점으로 기록될 것이다. 1989년 동유럽 체제 전환, 1991년 소비에트연방(소련) 붕괴, 2001년 9·11테러,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2020년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팬데믹에 버금가는 충격과 파급력을 주고 있다. 제로섬게임의 거대한 체스판에 안보 딜레마라는 판도라상자가 열렸고 신냉전(New Cold War)이 표면화되는 계기가 마련됐다. 정치, 경제를 비롯해 전 영역에서 지구적 차원의 변화가 빠르게 이뤄질 것이다.
○ 우크라이나 전쟁의 함의
우리는 지금 글로벌 복합대전환 시대에 산다. 코로나19 팬데믹을 비롯해 미국, 중국, 러시아, EU 간 전략 및 패권 경쟁, 제4차 산업혁명과 디지털 대전환, 글로벌 공급망 및 가치사슬 재구성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하고 있다. 상대적 국력 변화를 가져올 많은 게임체인저가 한꺼번에 등장했다. 도전과 기회가 함께 존재한다. 초(超)불확실성 속에 국가마다 사활적 이익을 놓고 치열하게 경쟁한다.
우크라이나 전쟁은 이런 국제 환경에서 탈냉전 이후 미국, EU와 러시아 사이에 축적된 불신과 갈등의 일면이 표출된 것이다.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의 동진(東進)과 이를 사활적 위협이라고 본 러시아의 인식이 지정학적 요충지 우크라이나에서 맞붙었다고 볼 수 있다. 미-중-러 중심의 질서 창출, 러시아의 옛 소련 영향력 회복 및 영광 재연의 연장선에서 벌어지는 일이기도 하다.
우크라이나 전쟁의 이면에는 △첫째, 강대국 간 사활적 이익이 담긴 레드라인 설정 △둘째, 글로벌 질서 재편을 둘러싼 미-EU-중-러 전략 및 패권 경쟁 △셋째, 지정학적 중간국(완충국가)의 위상과 역할 △넷째, 국가 지도자의 리더십과 국가비전 △다섯째, 디지털 대전환시대 지구적 차원의 공감과 뉴미디어 역할 등이 복합적으로 연계돼 있다.
○ 위력 발휘하는 금융제재
미국과 EU가 꺼낸 러시아의 스위프트 결제망 퇴출 조치는 금융 핵폭탄 투하 효과를 발휘하고 있다. 스위프트 제재는 혈액과 같은 금융을 마비시키는 것과 같다. 경제적으로 상호의존하는 상태에서 양날의 칼로 작용하기 때문에 실행하기 어려운 조치임에도 취한 것은 사안의 엄중함을 보여준다.
푸틴 대통령과 실로비키(Siloviki·옛 KGB 출신들) 측근, 돈줄 올리가르히(신흥 재벌)에 대한 추가 제재도 이뤄졌다. 신용등급 하락, 글로벌 기업 철수, 루블화 가치 하락과 러시아 증시 중단 등 타격이 크다. 러시아는 기준금리 인상, 외환 유출 금지 등으로 대응했지만 역부족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 효과는 더욱 커질 것이기에 러시아로서는 명분 있는 출구를 고민하지 않을 수 없어 보인다.
에너지 식량 인플레이션 통화전쟁과 금융체계 혼돈 등 글로벌 경제에 미치는 후폭풍도 만만치 않을 것이다. 자유무역을 중시하는 기조에서 글로벌 가치사슬과 공급망 재편으로의 움직임도 빨라질 것이다.
○ 푸틴 핵무기 카드 현실화 가능성 낮아
푸틴 대통령은 핵무기 카드를 꺼내 들었다. 핵무기는 핵 억지이론에서 보듯 실제로 사용하지 않은 채 공갈협박으로 상대방 굴복과 양보를 얻어내는 무기다. 사용보다 억지에 중점을 둔다. 핵무기가 갖는 위력에 따른 것이다. 냉전 시기에도 공포의 균형을 통해 전쟁을 피해왔다. 푸틴 대통령의 핵무기 카드 제시는 군사적 긴장을 높이고 자신의 입지를 강화시키려는 의도로 보인다. 조 바이든 미국 행정부도 핵전쟁 가능성을 일축하면서 평시 상태를 유지하는 등 푸틴을 자극하지 않으려 하고 있다.
이 핵무기 카드는 강대국 핵 사용 조건과 대량살상무기(WMD) 확산 금지라는 국제규범 효용성에 문제를 제기하고, 핵확산금지조약(NPT) 체제의 정당성과 근간을 흔드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 국제사회 비판과 함께 더 큰 명분 상실과 고립을 자초할 수 있다. 러시아 역시 사태 추이를 보며 신중하게 다룰 것이다.
합리적 판단을 전제로 핵무기 사용은 핵전쟁을 의미하며 지구촌 공멸을 가져오기에 현실화할 가능성은 크지 않다고 본다. 나토조약 5조에 의해 자동 군사개입이 적용되는 발트 3국이나 폴란드에 대한 공격도 쉽지 않을 것이다. 나토군과 러시아군이 직접 맞붙는, 성격이 완전히 다른 전쟁으로 비화하기 때문이다. 추가 군사적 충돌의 레드라인이라 볼 수 있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는 2차 휴전 협상에서 ‘인도주의 통로와 주변 지역 휴전’이라는 합의를 이끌어 냈으나 러시아가 대피하는 민간인을 향해 포격을 가하는 등 지켜지지 않았다. 다만 대화의 끈을 놓지 않는 것은 긍정적이다. 그럼에도 양측 입장 차가 커서 난항이 예상된다. 전쟁 상황 전개에 따라 협상 진척 여부도 달라질 것이다.
회담이 중요한 이유는 전쟁 당사자 간 협의이며 미-러 후속 협상의 기반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침공으로 취소된 미-러 외교장관 회담이 언제 이뤄질지도 지켜봐야 한다. 프랑스 독일 터키 중국 등의 중재와 다자외교도 활발해질 것으로 보인다.
○ 국제질서는 어떻게 변모할까
첫째, 유라시아 전략공간을 포함해 국제질서 재편 움직임이 가속화할 것이다. 신냉전 상황에서 공유하는 가치와 체제를 중심으로 진영 구축 경쟁이 심해질 것이다.
둘째, 군비 경쟁과 미중 패권 경쟁도 더 심해질 것이다. 미국의 인도태평양전략 및 그에 따른 쿼드(Quad) 오커스(AUKUS) 인도태평양경제프레임(IPEF)과 중국몽(中國夢)에 따른 일대일로(一帶一路)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AIIB) 등의 대결도 격화할 것이다.
셋째, 동북아시아와 한반도 지역에서 한미일 대 북-중-러 대결 구도가 재연될 가능성이 높다. 대만해협과 남중국해 정세 불안정은 물론이고 북핵 문제 해결에도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이다. 지난해 교역액 273억 달러인 한-러 관계 역시 경색 국면이 될 것으로 보인다.
넷째, 21세기에 정당성과 명분 없는 전쟁은 국제사회의 비판을 받으며 고립을 자초한다는 점을 보여준다. 국제 여론이 중요하게 작용하는 가운데 디지털 대전환, 뉴미디어 시대를 반영하는 새로운 국제규범 창출과 국제적 사회운동이 활성화할 수 있다.
우크라이나 전쟁은 국제정치의 냉혹함과 변화무쌍함을 알려주고 있다. 지정학적 중간국에 국민통합과 전략적 사고, 대외정책의 중요성을 일깨워주는 반면교사다.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촉발된 글로벌 정치·경제 질서 재편에 잘 조응하고 모든 지식과 역량을 모아 국가전략대강(大綱)을 성안하고 실천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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