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대한 연꽃 한 송이가 활짝 피었다. 백련도 아니고, 홍련도 아니다. 까만색 연꽃, 세상에 그런 연꽃이 어디에 있는가. 있다. 경북 경주엑스포대공원 안에 있는 솔거미술관에 가면 볼 수 있다. 연못 옆의 제일 커다란 전시실에 전시돼 있다. 둥그렇게 만개한 꽃은 절정기의 화려함을 구가하고 있다. 열대여섯 개의 꽃잎은 각기 표정을 달리하면서 신라문화의 정수를 담고 있다. 우선 한복판의 꽃술 부분을 보자. 성덕대왕신종, 첨성대, 황룡사 목조구층탑, 안압지 등이 다정하게 어울리고 있다. 그 주위 꽃잎에는 석굴암 본존상을 비롯해 칠불암 석불, 금강역사, 골굴사 석불, 용장사 석불, 불국사, 분황사, 인면기와, 오리형 토기, 천마 등등 다양하게 동원돼 있다. 모두 경주에서 볼 수 있는 신라문화의 상징적 도상들이다. 관객은 경주의 대표적 문화유산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안복(眼福)을 누릴 수 있다.
흑련(黑蓮)을 만든 주인공은 소산 박대성이다. 그는 신라인으로 자처하면서 연고도 없는 경주에서 화실 짓고 생애의 후반부를 보내고 있다. 오로지 수묵의 붓 한 자루만 가지고 신라문화와 씨름하고 있다. 이제 나름대로 성과를 보이고 있어 다행스럽다. 위의 ‘몽유신라도원도’(2021년)도 그런 성과 가운데 하나다. 꿈속에서 본 신라의 이상향을 그린 대작이다. 5m 높이에 길이 12m, 정말 웬만한 전시장에는 걸 수조차 없다. 노익장이라 할까, 대작에의 도전은 화가의 원숙미와 직결되고 있다. 화가는 주제에 맞는 다양한 소재를 한 화면으로 끌어내 배치하고 연출한다. 위 그림 측면에 쓰인 것처럼 ‘원융무애(圓融無碍)’의 경지다. 두루두루 통하여 거리낌이 없다. 신라의 원효는 무애사상을 강조했다. 각박하고 치열한 현대사회에서 절실한 정신이기도 하다. 그래야 또 다른 글씨 ‘불국화엄(佛國華嚴)’의 세계에 들어 갈 수 있다. 가톨릭 신자인 화가는 그림으로 불국화엄의 세계를 희구하고 있는 것이다. 8세기 통일신라 문화는 한반도 문화의 수준을 높여준 보배이기도 하다. 그러한 전통을 소산은 한류(韓流)의 속살로 보고 세계로 향하여 발신하고자 한다.
소산은 독학으로 자신의 예술세계를 일궜다. 비록 가시밭길이었겠지만 그만큼 독자적 화풍을 일궈낼 수 있었다. 거의 운명적인 선택, 바로 화가의 길이었다. 소산은 6·25전쟁 시기에 부친과 더불어 자신의 팔 하나를 잃었다. 신체적 장애를 딛고 일가를 이룬 불굴의 의지는 젊은 세대에게 귀감이 될 만하다. 그는 붓 잡는 방식부터 다르다. 대부분의 화가나 서예가들은 손끝으로 붓을 잡고 손목을 움직이면서 그리거나 쓴다. 하지만 소산은 붓을 주먹 쥐고 잡아 절대로 손목을 움직이지 않고 팔뚝을 움직이면서 그린다. 필력은 그래서 힘차다. 바로 기운생동의 경지다. 게다가 그는 평생 붓글씨 연습을 한다. 필획이 가지고 있는 에너지를 붓끝으로 옮기고 있다. 그는 붓 하나로 세상과 대결하면서 화면에 기운을 불어넣고 있다. 이 점이 여타의 서화가와 다르게 하는 특징이다.
날로 수묵화가 희미해지고 있어 문제다. ‘줄긋기 10년’, 화가 입문 단계에서 요구하는 기초실력 함양, 요즘 세상에 어느 누가 줄긋기에 10년 세월을 투자하겠는가. 그래서 필력 있는 화가를 보기 어렵게 되었다. 수묵화의 장점이 날로 퇴색하고 있어 안타깝다. 동북아시아 전통문화에서 차지하고 있는 수묵의 위상은 굳이 강조할 필요조차 없다. 서양의 유화 붓과 달리 동양의 모필은 360도 회전하면서 자유자재로 운필의 묘미를 살릴 수 있다. 그래서 기초 훈련과정이 더 중요하다. 서화는 인격 도야의 방편이기도 하다. 오늘날 소산 수묵화는 괜히 나타난 것이 아니다. 그런 결과를 국내보다 해외에서 먼저 알아 본듯하여 야릇하다. 올 한 해는 소산의 해가 아닐까 싶다. 올봄 독일을 비롯해 이탈리아, 그리고 카자흐스탄 등에서 순회 개인전을 개최한다. 그뿐만이 아니다. 하반기에는 로스앤젤레스(LA)카운티 뮤지엄(LACMA)을 필두로 하버드대까지 다섯 군데 미술관에서 미국 순회 개인전을 개최한다. 게다가 미국의 한국미술 담당 교수들이 의기투합하여 소산 예술을 연구한 단행본도 출판한다. 소산 수묵화의 본질을 탐구하고 대중화하는 작업은 고귀하다.
소산 박대성은 자신의 상당수 작품을 경북도와 경주시에 기증했다. 이를 바탕으로 건립한 미술관이 솔거미술관이다. 경주엑스포대공원 안의 아담한 미술관, 거기에 가면 늘 소산 예술의 정수와 만날 수 있다. 사실 오늘날 젊은 세대에게는 뜨거운 공간이다. 승효상 건축가가 설계한 이 미술관은 그 자체가 작품이다. 전시실의 한 벽을 뚫어 밖의 연못을 볼 수 있게 설계했다. 그 유명한 포토존이다. 이름 하여 ‘내가 풍경이 되는 창’이다. 창밖으로 보이는 연못 아평지는 실내의 전시장과 딱 어울린다. 그처럼 아름다운 풍광이 어디에 있을까. 주말이면 발 디딜 틈조차 없을 정도로 붐비는 미술관. 분명히 이색 공간임에 틀림없다. 각박한 세상에서, 채색 난무의 시대에서, 본질을 추구하는 먹그림의 세계, 이는 울림이 클 수밖에 없으리라.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