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구 문명의 기원이라고 불리는 그리스 민주정은 그해의 투표로 인해 파국의 길로 들어서게 된다.
민주정치의 꽃이라고 불리는 투표는 자칫 나라를 파국으로 이끌 수 있다.
그해 아테네에서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일까?》
투표로 정책 결정한 아테네
아테네 시민들은 프닉스 언덕으로 올라갔다. 소중한 한 표를 행사하기 위해서였다. 그날의 투표는 지도자를 선출하는 것이 아니라, 국가 정책을 결정하는 것이었다. 분쟁이 발생한 시칠리아에 대규모 자국 원정대를 출병시키는 것에 대한 가부를 묻는 투표였다. 아테네에서 시칠리아까지는 직선거리로 따지면 752km이고, 해로를 따라 돌아가면 족히 1000km 거리다. 그 먼 곳에 대규모 군대를 보낸다는 것은 국가적인 모험이 될 터였다.
당시 아테네는 스파르타와 16년째 전쟁 중이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전염병이 창궐해 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었다. 나라가 이런 곤경에 빠져 있는데, 이탈리아 남단의 지역 분쟁을 해결하기 위해 대규모 군대를 파병해야 하는가? 니키아스 장군은 원정을 반대했고, 알키비아데스 장군은 지지했다. 그날 아테네 시민들은 두 사람의 연설을 듣고 시칠리아 원정에 대한 찬반투표를 하기로 했다.
‘한 표’ 설득위한 연설 대결
먼저 니키아스 장군이 연단에 올랐다. 그는 아테네 시민들에게 원정을 반대하라고 촉구했다. 원정에 성공할 가능성이 매우 낮기 때문이다. 북아프리카의 카르타고인들도 정복이 아니라 공존을 택할 만큼, 시칠리아는 그리 만만한 적수가 아니다. 설령 점령에 성공한다고 해도 먼 거리에 있는 식민지를 통치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 될 것이다. 가장 심각한 문제는 원정을 위해 대규모 군대를 출병한 틈을 타서 스파르타가 침공해 올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현재 시칠리아의 패권 국가인 시라쿠사를 공격 목표로 삼는 것도 잘못된 것이다. 오히려 시라쿠사가 패권을 유지하는 것이 아테네의 국익에 도움이 된다. 시라쿠사가 시칠리아를 통치하려면 크고 작은 분쟁을 해결해야 하기 때문에 아테네의 적국인 스파르타를 도울 여력이 없어지게 될 것이다. 니키아스의 연설은 아테네가 처해 있던 국제 정세를 반영하고 있는 것처럼 들렸지만, 사실은 한 사람을 공격하려는 의도를 숨기고 있었다. 원정군의 공동 사령관으로 임명된 알키비아데스였다. 나이가 30대 중반에 불과한, 경험도 없고 경륜도 없는 그가 “군림하고 싶은 열망에 사로잡혀” 원정을 부추기고 있다는 것이다. 니키아스는 알키비아데스를 ‘애송이’라 부르면서, 국가의 원로들이 이 ‘애송이’의 전쟁 사주를 막아 달라고 호소했다.
이어 알키비아데스가 연단에 올랐다. 니키아스로부터 ‘애송이’라는 인신공격을 받은 그는 “저는 어떤 사람보다 지휘관이 될 권리를 갖추었고, 또 저에게는 그런 자격이 있다고 확신합니다”라는 말로 연설을 시작했다. 그는 원정이 반드시 성공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시칠리아의 도시국가들이 분열되어 있고, 그들의 전투력은 형편없어서 아테네의 적수가 되지 못한다는 장밋빛 전망을 제시했다. 제국의 맹주인 아테네는 다른 약소국의 어려움에 도덕적인 의무감을 가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아테네에 군사적 도움을 청하고 있는 시칠리아의 약소국인 세게스타를 외면한다면 다른 도시국가들이 우리를 제국의 맹주로 인정하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사욕에 눈먼 시민들의 결정
알키비아데스의 연설이 끝났다. 아테네 시민들은 그의 패기에 환호했고, 논리에 탄복했다. 그들은 더 열렬하게 시칠리아 원정을 지지하고 나섰다. 그러나 여기서 물러설 니키아스가 아니다. 그는 원정대를 굳이 파견한다면 지금 예상보다 훨씬 더 많은 함선과 군인을 보내야 한다고 주장했다. 사흘 전에 결정된 60척의 함선과 1만2000명의 일반 병사로는 참패를 면치 못할 것이라고 으름장도 놓았다. 그러면서 최소한 100척의 함선과 2만 명의 일반 병사, 그리고 최소 5000명의 중무장 보병을 출병시켜야 한다고 강조했다. 개인은 더 많은 세금을 부담해야 하고, 징집 대상이 모든 시민에게로 확대될 것이라고 은근히 겁도 주었다.
두 사람의 연설이 끝나자 아테네 시민들은 결정을 내렸다. 투표를 통해 시칠리아 원정을 압도적인 표 차이로 지지한 것이다. 아테네 시민들은 알키비아데스의 논리와 니키아스의 반론을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했다. 알키비아데스는 개인적인 영광을 독차지하고 싶어서 그런 연설을 한 것이고, 니키아스는 원정을 포기시키기 위해 전쟁 비용을 부풀린 것이다.
기원전 415년의 이 투표를 냉정한 시선으로 기록했던 그리스의 역사가 투키디데스는 “아테네 시민들의 욕심” 때문에 이런 결정이 내려졌다고 썼다. 그들이 찬성표를 던진 것은 시칠리아의 수많은 신전에서 넘쳐나는 금은보화와 시칠리아의 기름진 땅을 차지하게 될 것이라는 욕심 때문이었다. 장년층은 니키아스의 연설에 선동되어 최소한 안전할 것이라고 믿었고, 청년층은 알키비아데스의 연설에 선동되어 “먼 나라를 보고 싶은” 모험심에 사로잡혔으며, 참전 용사들은 받게 될 일당 계산에 바빴다. 투키디데스가 관찰한 대로, “사람들은 겁이 나거나 의혹이 생길 때는 감정에 영합하는 논리에 잠시 귀가 솔깃하지만, 나중에 행동할 때가 되면 자신의 이해관계를 따르는 법이다.” 당시 아테네 시민들의 투표는 철저하게 개인의 이해관계에 따라 결정된 것이었다.
이렇게 결정된 시칠리아 원정은 참혹한 패배로 끝났고(기원전 413년), 이로 인해 아테네는 망국의 길로 들어선다. 투키디데스가 “그리스 역사상 가장 참혹했던 대학살”로 평가했던 시칠리아 원정의 처절한 패배와 함께 아테네의 국력은 급격하게 쇠퇴했고, 결국 스파르타에 나라를 빼앗기고 말았다(기원전 404년). 그날의 투표가 이런 엄청난 망국의 역사로 이어진 것이다.
대한민국 국민, 선택의 날
오늘은 대한민국의 제20대 대통령을 선출하는 날이다. 기원전 415년의 아테네 시민들처럼, 우리도 오늘 나라의 운명을 투표로 결정하게 된다. 정치가들은 언제나 권력을 잡기 위해 노력하고, 그것은 보수와 진보가 매한가지다. 그들을 나무랄 수도 없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오늘 그들 중에서 한 명을 선택하는 것이고, 그 결과의 책임도 우리가 진다는 것이다.
시칠리아 원정으로 촉발된 아테네의 쇠락을 예리하게 관찰했던 투키디데스는 지도자의 참 덕목으로 네 가지를 제시했다. 첫째, 무엇이 필요한지 볼 수 있는 식견이 있어야 하고, 둘째, 본 것을 설명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하며, 셋째,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을 가져야 하고, 넷째, 돈에 초연한 사람, 즉 사리사욕을 밝히지 않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나의 표를 받을 사람이 이런 덕목을 갖춘 사람인지 차분히 생각해 보고 투표장으로 갔으면 한다. 아테네 시민들처럼 니키아스와 알키비아데스의 연설에 현혹되어 잘못된 선택을 하게 된다면, 우리의 미래는 아테네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오늘의 투표를 통해 대통령을 선출하는 것은 우리의 권리지만, 그 결과에 대해 책임지는 것 역시 우리의 몫이다. 오늘의 투표는 우리 미래를 위한 소중한 투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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