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24일 오전 11시 중국 베이징에 있는 한국대사관 1층 다목적홀을 찾았다. 제20대 대통령선거의 해외 유권자 재외 투표장인 이곳에는 이미 수십 명의 교민이 줄을 서 있었다. 대부분 차로 30분쯤 떨어진 한국인 밀집 거주지역 왕징(望京)에서 온 사람들이다.》
올해로 11년째 중국에서 살고 있는 전모 씨(47)는 “악화할 대로 악화한 한중 관계를 잘 풀어줄 수 있는 새 대통령이 필요하다. 절박한 심정으로 투표장에 왔다”고 했다. 중국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15년째 사업을 하고 있다는 이모 씨(42) 역시 “양국 관계 악화로 한국 교민도 많이 줄었다. 이들을 상대하는 사업도 점점 힘들어지고 있다”고 하소연했다.
중국에 파견 온 지 3년째인 대기업 주재원 김모 씨(45)는 “주요 후보의 공약에서 한중관계 개선 내용을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누가 당선되더라도 쉽지 않은 문제”라고 말했다.
中매체 “美에 치우치지 말라”
한국 대선을 앞두고 중국 매체들은 잇따라 한국이 미국과 중국에서 균형을 찾아야 한다는 취지의 주장을 내놓고 있다.
관영 환추시보는 9일 “사드(THAAD·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문제 처리는 한국과 중국이 외부 간섭을 극복한 사례”라며 노골적으로 미국을 겨냥했다. 대선 결과에 관계없이 한중관계의 후퇴는 없어야 한다고도 했다. 관영 영자지 글로벌타임스 또한 8일 “한국이 중립을 포기하고 미국의 반중 전략에 동참한다면 한국은 강대국 경쟁의 최전방이 될 것”이라고 강하게 경고했다. 새 정부가 중국의 국가안보에 피해를 주는 미국의 전략에 동조한다면 과거 사드 때보다 훨씬 큰 대가를 치러야 할 것이라고도 했다.
신징보는 7일 “미국은 중국과의 경쟁에서 유리한 위치를 점하기 위해 한국의 ‘전략적 모호함’을 원하지 않을 것이고 한국을 미국 쪽으로 끌어들이려 할 것”이라며 “한국의 새 정부는 미국의 압력으로부터 더 신중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가세했다. 한중 경제 협력의 중요성을 언급하며 “안보와 경제의 균형을 맞춰야 하는 한국이 중국을 상대로 실용적인 외교를 펼쳐야 한다”고 했다.
중국은 여러 차례 한국이 미국 편에 서면 안 된다고 경고해 왔다. 지난해 11월 요소수 대란 당시 공산당 기관지 런민일보 계열의 매체 런민쯔쉰은 “이번 위기를 통해 한국은 중국의 중요 지위를 더 분명히 인식해야 한다. 중국에 대항하면 반드시 자신이 해를 입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왕이 “한반도 문제는 미국 탓”
중국은 지지부진한 북한 비핵화 협상 등 한반도에 관한 모든 문제가 미국 탓이라며 미국이 여러 동맹을 만들어 중국을 고립시키고 있다는 기존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이달 4일부터 11일까지 열리는 중국의 연례 최대 정치 행사인 ‘양회(兩會)’에서도 중국 수뇌부는 미국을 거침없이 비판했다. 양회는 중국 최고 정책 자문기구인 전국인민정치협상회의(정협)와 국회 격인 전국인민대표대회(전국인대)를 합쳐 부르는 말이다.
왕이(王毅) 외교부장은 7일 기자회견에서 “한반도 문제의 뿌리는 북한이 직면한 외부의 안보 위협이 해소되지 않고 있는 데 있다. 북핵 문제 해결은 미국의 태도에 달려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2018년 이후 북한이 대화를 위한 긍정적 조치를 했음에도 제대로 보상을 받지 못했다며 “미국이 북한의 합리적 안보 우려를 해결하는 실질적 조치를 취하고 북한과 상호 신뢰를 구축해야 한다”고 했다. 특히 그는 “중국은 한반도 문제의 해결을 위해 건설적 역할을 계속하기를 원한다”며 앞으로도 북한 편을 들겠다는 뜻을 분명히 했다.
그는 미국 영국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 등 5개국의 정보동맹체 ‘파이브 아이스’, 미국 일본 인도 호주 등 4개국 협의체 ‘쿼드’, 미국 영국 호주의 안보동맹 ‘오커스’ 등을 거론하며 “소그룹을 만들어 중국을 압박하는 것은 양국 관계의 큰 국면을 해치고 세계 평화와 안정에도 충격을 주고 있다”고 했다.
특히 그는 미국이 인도태평양판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를 만들려 하고 있다며 “역내 국가의 전체적이고 장기적인 이익을 해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러시아와 밀착은 강화
지난달 24일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후 줄곧 러시아 비판에 미온적이던 중국은 양회를 통해 러시아를 지지한다는 뜻도 분명히 했다. 이날 왕 부장은 “국제적인 풍운이 아무리 험악해도 러시아와 포괄적, 전략적 협력의 동반자 관계를 전진시켜 나갈 것”이라며 두 나라는 모두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으로 가장 중요한 이웃이자 전략적 파트너라고 강조했다.
그는 “복잡한 문제를 해결하는 데 필요한 것은 냉정과 이성이지 불난 집에 부채질하며 갈등을 격화시키는 것이 아니다”라며 서방의 러시아 제재를 반대한다는 뜻을 밝혔다. 기자회견 내내 ‘침공’ ‘침략’ 대신 ‘우크라이나 사태’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중국은 미국, 영국 등 서방이 러시아산 에너지 수입을 금지하기로 한 것에 대해서도 러시아를 도울 뜻을 밝히고 있다. 8일 블룸버그뉴스는 중국이 중국석유공사, 알루미늄공사 등 국영기업을 동원해 가스프롬 등 러시아 에너지 대기업의 지분을 사들이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고 전했다.
로이터통신 등에 따르면 최근 중국 주요 전자상거래 플랫폼에서는 러시아 상품이 속속 매진되고 있다. 많은 중국인이 러시아를 지지한다며 러시아 물품을 사들이고 있는 것이다. 제품 구매 후기를 통해 노골적으로 러시아 지지 의사를 남기는 중국 누리꾼 또한 적지 않다.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중국과 러시아 관계가 더 끈끈해지면 중국 러시아 모두 북한에 대한 지배력을 강화하고 이를 통해 서방에 맞서려 할 것이라는 분석이 제기된다. 서방의 경제 제재가 러시아를 넘어 중국으로까지 확대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가뜩이나 치열하게 대립 중인 미중 관계가 회복하기 힘들어지는 것은 물론이고 중국에 대한 무역 의존도가 높은 한국에도 상당한 부담이 될 것으로 보인다. 새 정부가 떠안아야 할 난관인 셈이다. 주중 한국대사관 관계자는 “중국과 러시아의 관계가 공고해질수록 북핵 문제 해결 등에는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라면서 “중국-러시아-북한 등이 나머지 국제사회와 대립할수록 한국이 적극적으로 움직일 수 있는 공간 또한 줄어든다”고 전망했다.
이를 감안할 때 중국의 한국 관련 정책은 10월로 예정된 공산당 제20차 당 대회까지는 큰 변화가 없을 것으로 보인다. 시진핑(習近平) 국가주석의 장기 집권(3연임)이 확정되는 당 대회 전까지는 공산당 수뇌부가 국내외 안정을 최우선으로 할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베이징 외교가에서는 “한국의 새 정부가 5월 출범해도 중국의 새 지도부가 꾸려지는 10월 이후에야 한중관계에서 변화를 기대할 수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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