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그리스의 민주정에는 트집 잡힐 만한 약점이 있다. 이 정체(政體)에서는 18세 이상의 남자들만 공직을 수행하고 정치적 결정에 참여할 수 있었다. 노예들은 물론이고 여성들에게조차 정치·경제적 권리가 없었다. 하지만 당시 문명 세계의 거의 모든 나라가 왕이나 소수 귀족의 지배 아래 있었음을 기억하자. 그런 상황에 비춰보면 다수 시민의 정치 참여를 보장한 정체의 수립은 놀라운 정치적 혁명임에 틀림없다. 이런 혁신적 정체의 수립에 기여한 정치가들이 많지만, 솔론(기원전 640년경∼기원전 560년경)은 그중 첫손에 꼽히는 인물이다.》
빈부 격차, 사회불안 커진 아테네
솔론은 기원전 7세기 후반 아테네의 위기가 불러낸 정치인이었다. 이 무렵 아테네를 포함한 아티카 지역의 소농층은 몇 해 동안의 기근과 인구 증가로 인한 토지 부족 때문에 파산 상태였다. 소수 부자들의 상황은 정반대였다. 이들은 늘어나는 해상무역과 상거래 등에 힘입어 부를 축적했다. 새로 도입된 화폐 역시 부의 유동성을 높임으로써 빈부 격차를 심화시켰다. 많은 사람이 빚을 갚지 못해 노예 신세로 전락하거나 외국의 노예로 팔려나갔다. 아들과 딸을 팔아넘기는 부모들도 생겨났다. 소농층의 불만은 폭발 직전이었고 귀족들마저 위기의 심각성을 우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솔론이 남긴 시에는 당시의 위기 상황이 이렇게 그려져 있다. “수호여신 아테네가 높은 곳에서 두 손을 펼치신다. 하지만 시민들 자신이 돈에 마음을 빼앗겨 어리석음으로 위대한 도시를 망치려 한다. 대중의 지도자들도 생각이 부정하니, 이들은 커다란 오만이 낳을 온갖 고통을 피할 길 없구나. … 피할 수 없는 상처가 벌써 온 도시에 퍼졌다. 도시는 순식간에 끔찍한 노예 상태에 떨어지고 혈육 간의 불화와 잠든 전쟁을 깨워 일으켜 많은 이들의 소중한 삶이 사라진다.”
이런 위기 속에서 솔론은 ‘최고행정관’이자 ‘중재자’로 선출되었다. 자칫 내전으로까지 번질 만큼 심각한 사회적 갈등을 조정하고 중재하는 일이 그의 임무였다. 이 과제를 수행하는 데 솔론은 주저하지 않았다. 그는 사회의 거의 전 분야에 걸쳐 개혁 조치들을 단행했는데, 이를 일컬어 ‘솔론의 개혁’이라고 부른다.
개혁의 첫 조치는 부채 탕감이었다. 농민에게 빼앗긴 자유를 되찾아주는 일만큼 시급한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또 몸을 담보로 해서 돈을 빌릴 수 없게 만들었다. 농민들 자신뿐만 아니라 저당 잡힌 농토도 해방되었다. “저당 잡힌 땅에서 곳곳에 박힌 경계석들을 치워버렸다. 지난날 노예였지만 지금은 자유다.” ‘땅의 해방자’ 솔론은 개혁의 성취를 이렇게 자랑했다. 큰 잘못 없이 벼락거지가 된 사람들의 가산(家産)에 붙은 차압 딱지를 모두 제거한 조치였다.
부채 탕감, 참여정치 확대 ‘개혁’
솔론의 개혁은 정치 영역에서도 이루어졌다. 그는 재산 등급에 따라 전체 시민을 네 계층으로 나누고 정치 참여 기회에 차등을 두었다. 올리브유 같은 유류와 곡물의 연간 생산량이 계층을 나누는 기준이었으니, 우리의 눈에는 매우 소박해 보인다. 이 제도 아래서는 ‘최고행정관’ 등의 고위직은 최상 계층의 시민들만 맡을 수 있었고, 그 밖의 관직 역시 상위 세 계층의 시민들에게만 허락되었다. 최하층 시민들의 공직 참여 배제는 재산 있는 사람들의 정치적 입지를 고려한 결정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최하층민에게서 정치 참여의 기회를 박탈하는 것이 솔론의 목표는 아니었다. 그들도 민회와 배심원 재판에 참여할 권리를 보장받았기 때문이다. 솔론은 일부러 법조문들을 모호하게 만들어 최종 재판이 배심원 재판에서 이루어지게 했다고 한다. 최하층 시민들의 정치적 권한을 실질적으로 보장하기 위한 속 깊은 결정이었던 셈이다.
솔론이 단행한 개혁은 그 밖에도 수없이 많다. 피해의 당사자가 아닌 제3자도 타인이 입은 피해를 고발할 수 있는 제도를 마련한 것도 그중 하나이다. 모든 시민이 하나의 공동체 정신을 갖도록 하기 위한 제도였다. 여성의 권익 보호를 위한 법도 도입했다. 결혼 지참금을 없애고 신부가 옷 세 벌과 약간의 세간 외에 다른 것을 가져오지 못하게 한 법이 한 가지 사례이다.
솔론은 또 시민들에게 “중용을 소중히 하라”고 권고하면서도 도시의 내분 상황에서 무기를 들어 양쪽 중 어디에도 가담하지 않은 사람에게는 불명예를 주거나 국가의 공직에 참여하지 못하게 했다. 얼핏 보면 이 요구는 솔론 자신이 강조한 중용의 정신에 어긋나는 것 같다. 하지만 우리는 그가 강조한 중용이 적당한 타협이나 거리 두기가 아니라 가능한 것들 가운데 최선의 선택을 강제하는 덕목이었음을 기억해야 한다.
‘솔론의 개혁’은 당시 아테네인들에게 환영을 받았을까? 물론 우리는 대답을 쉽게 예상할 수 있다. 가난한 사람들과 부자들 모두 그의 개혁에 불만을 토로했다. 대중은 그가 모든 것을 재분배하기를 원했고, 부자들은 개혁이 지나치다고 불평하면서 옛 질서로 돌아가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솔론의 부채 탕감 조처를 비난하는 뒷소문도 떠돌았다. 탕감 계획에 대한 정보를 미리 입수한 그의 몇몇 친구가 다른 사람들에게 빚을 내어 엄청난 땅을 사들여 부동산 이익을 보았다는 소문이었다.
하지만 후대 정치인들이나 철학자들에게 솔론은 개혁의 아이콘이자 민주정의 아버지로서 추앙받았다. 특히 아리스토텔레스는 ‘아테네의 정체’에서 ‘솔론의 개혁’이 갖는 민주적 측면을 세 가지로 꼽았다. 가장 중요한 것은 몸을 담보로 돈을 빌리지 못하게 한 것, 둘째는 억울한 사람들을 위해 원하는 사람이 구제 조치를 취할 수 있게 한 것, 셋째는 배심원 재판에서 상소심 재판을 하게 함으로써 대중의 힘을 강화한 것이다.
‘선한 개혁’이 ‘선한 평가’ 받았나
솔론의 시대나 지금이나 사회적 위기의 양상이나 위기 극복을 위한 개혁의 본질은 다르지 않다. 개혁 정책에 대한 대중의 반응 역시 다르지 않을 것이다. 솔론은 권력의 자리를 떠나면서 이런 말을 남겼다. “그들은 한때 내게 엄청난 기대를 걸더니, 지금은 화가 나서 나를 원수처럼 노려본다.” 전체 시민의 기대 속에 선출된 정치가의 운명이 그랬으니, 절반가량의 지지를 받고 선출된 새 대통령의 5년 뒤 운명은 어떨까? 솔론을 불러내어 조언을 구한다면, 그는 우리의 미래를 위해서 무슨 말을 할까? 지혜로운 솔론은 새로운 정치를 위한 장황한 조언 따위는 하지 않을 것 같다. 좋은 정치와 올바른 개혁의 길은 그의 행동이 이미 보여주었으니까. 게다가 솔론의 개혁은 우리가 현실 정치에서 기대할 수 있는 것과 정치가들이 대중에게서 예상해야 할 것을 모두 보여준 셈이 아닌가. 지나친 기대와 열광이 아니라 냉정한 현실 인식과 분별이 덜 실망스러운 정치, 더 나은 정치를 낳는 힘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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