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위 ‘칙릿(chick+literature)’ 장르의 드라마를 좋아한다. 2030 직장 여성의 일과 사랑을 다루기에 공감은 쉽고 위안도 크다. ‘왕자 찾기’의 틀을 벗어나지 못했던 과거와 달리 최근에는 다양성 가족을 표방하거나, 성취와 경쟁을 전면에 내세우는 등 시대 흐름을 반영한 다양한 변주가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그 속에도 깨지지 않는 불문율이 있었으니, 바로 친구. 보다 구체적으로는 무엇이든 터놓고 나눌 수 있고 필요할 땐 언제든 달려와 주는 대체로 동성의 친구다. 물론 그들은 예외 없이 가까이에 산다.
그렇다. 드라마적 삶의 구성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요소는 왕자도, 결혼도, 대단한 성공도 아닌, 지친 하루 끝 추리닝 차림으로 동네 편의점에서 만나 맥주 한 캔 나눌 수 있는 ‘동네 친구’인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가장 비현실적인 드라마적 허용이다. 주거 지역은 대체로 예산과 직장이 결정한다. 마음 맞는 친구 몇 갖기도 쉽지 않은 세상에서, 그런 친구가 심지어 집까지 가까울 확률은 과연 얼마나 될까.
그런데 그 비현실적인 일이 내게도 일어났다. 얼마 전 가장 친한 친구 M이 근방으로 이사를 온 것이다. 이사 날을 달력에 표시해 놓을 정도로 기다렸지만, 각자의 직장과 가정 탓에 막상 만날 엄두를 내기란 쉽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너덜너덜한 귀갓길, 혹시나 하는 마음에 전화를 걸었다. “집으로 올래?” 여태 혼자 빈속인 게 미안해 뭐라도 사 가겠다고 하니 한사코 사양을 해 빈손으로 문을 두드렸다. “세상에, 언제 이렇게 컸어?” 일 년에 몇 번, 퇴근 후 식당에서 만나 밥 한 끼 함께하는 게 전부인 해가 거듭되면서, 배 속에서부터 만났던 아이는 어느덧 꼬마 숙녀가 되어 있었다.
M이 내어준 편한 옷으로 갈아입자, 몸과 마음의 긴장이 함께 풀려나갔다. 능숙하게 요리하는 낯선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얼른 밥부터 먹으라며 밥상에 앉히는 모습이 꼭 엄마 같다고 생각했다가, “엄마 엄마” 외치는 아이 모습에 정신이 들었다. 교복 입고 같이 쫄면 먹으러 다니던 게 엊그제 같은데. “이걸 네가 했다고?” 도가니를 넣어 끓였다는 뭉근한 된장찌개는 탄성이 절로 나왔다. 입맛 없다는 말이 무색하게 밥 한 공기를 말끔히 비웠고, 뒤이어 M이 뚝딱 술상을 내 왔다. 이제는 제법 대화가 되는 아이와 함께 물로 ‘짠’을 하며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그야말로 꿈같은 저녁을 보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마음이 들떴다. 퇴근길 번개, 편의점 캔맥, 공원 산책 등 ‘동네 친구’와 해보고 싶은 일들을 기쁘게 나열했다. 물론 오늘이 정말 ‘드라마틱’했을 뿐, 막상 엄두내기란 쉽지 않을 것임을 모르는 바 아니다. 어쩌면 만남의 빈도는 전과 크게 차이가 없을 수도. 하지만 추리닝 차림으로 맥주 한 캔씩을 두고 마주 앉은 우리를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편안하고 든든하다. 친구가 내어준 옷, 끓여준 찌개처럼. 드라마가 옳았다. ‘역세권’ 집을 지키고자 매일을 보냈는데, 정작 내 드라마를 완성하는 것은 ‘친세권’이다. 그리고 그건 비단 물리적 거리만을 뜻하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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