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80년대는 ‘가전·자동차·반도체 왕국’ 일본의 최전성기였다. 미 하버드대 에즈라 보걸 교수는 1979년 ‘재팬 애즈 넘버원’이라는 책에서 일본 경제가 곧 미국을 추월할 것이라고 했다. 일본은 벌어들인 돈으로 아시아를 석권했다. 아시아 개발도상국 대부분이 엔화 대출과 투자에 의존했다. 필리핀에 있는 아시아개발은행(ADB)도 사실상 엔화로 운영됐다.
▷1990년대 이후 잃어버린 30년이 닥쳤지만 엔화 파워는 여전했다. 글로벌 위기가 터질 때마다 엔화는 ‘안전자산’으로 불리며 가치가 오히려 올라갔다. 쌓아 놓은 부(富)가 많아 부도날 우려가 없었다. 일본은 30년 연속 세계 최대 순채권국이다. 해외 자산에서 대외 부채를 뺀 순자산이 3700조 원으로 우리나라 한 해 예산의 6배다. 외환보유액도 중국에 이어 세계 2위다.
▷우크라이나 사태를 계기로 갑작스레 ‘엔화=안전자산’ 공식이 무너지고 있다. 엊그제 외환시장에서 달러당 엔화 가치는 한때 5년여 만의 최저 수준으로 떨어졌다. 일본 경제 버팀목이던 경상수지 흑자 기조가 흔들리고 있어서다. 후쿠시마원전 사고 이후 화력발전 비중을 크게 높였는데 원유 가격이 급등했다. 반면 기업들이 해외로 빠져나가 수출은 줄었다. ‘와타나베 부인’으로 불리는 투자자들의 ‘엔 캐리 트레이드’ 효과도 사라졌다. 예전에는 싼 엔화를 빌려 다른 나라에 투자했다가 위기 때 이를 청산해 엔화를 사들였다. 코로나 사태 이후 모든 나라가 제로금리에 나서자 투자 유인이 사라졌다.
▷달러화 유로화와 함께 3대 기축통화로 꼽히던 엔화 위상은 중국 위안화에도 밀려난다. 작년 12월 기축통화 지급금액 순위에서 위안화는 엔화를 제치고 달러화 유로화 파운드화에 이은 4위였다. 위안화 영향력은 계속 커진다. 일대일로 정책에 따라 중동과 아프리카 지역에서 이뤄지는 대규모 철도 및 인프라 투자가 위안화로 이뤄지고 있다. 미국에 화난 사우디아라비아는 중국으로 수출하는 일부 원유에 대해 사상 처음 위안화 결제를 검토하고 있다.
▷일본의 국내총생산(GDP) 대비 국가부채 비율은 258%로 베네수엘라에 이어 세계 2위다. 이자를 내려 빚을 내야 하는 천문학적인 규모다. 그런데도 문제가 없었던 건 다른 나라와 달리 국채의 90% 이상을 자국민이 사줬기 때문이다. 하지만 경상수지 적자가 쌓이고 엔화는 안전자산이라는 믿음이 깨지면 더 이상 빚의 수레바퀴를 굴릴 수 없는 순간이 온다. 일본이 연 500개의 해외진출 기업을 자국으로 불러들이며 제조업 재건을 서두르는 이유다. 결국 기업하기 좋은 환경이 국부의 근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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