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동네에 산 지 8년쯤 됐다. 집 앞에는 오래된 가게 셋이 삼각형 꼭짓점처럼 마주하고 있다. 아이스크림 냉장고와 허름한 평상을 놓아둔 구멍가게, ‘옷의 생명은 세탁, 국가기능사의 집’이라고 써 붙인 세탁소, 그리고 털보 아저씨가 운영하는 털보네 고물상. 주인들은 늘 가게 문을 활짝 열어뒀다. 서로가 두루두루 친해서 구멍가게 앞 평상에 모여서 시간을 보내다가 손님이 오면 흐허허 웃으며 털레털레 걸어갔다.
가장 먼저 없어진 건 구멍가게였다. 그 자리에는 24시간 편의점이 생겼다. 평상은 사라졌고 사람들은 모이지 않았다. 다음으로 없어진 건 국가기능사의 세탁소였다. 그 자리에는 온갖 종류의 음식을 조리해 배달만 전문으로 하는 분식집이 생겼다. 길고양이를 챙기던 세탁소의 밥그릇도 사라졌다. 고양이들은 종종 그 앞을 서성이다가 사라졌다.
이어서 털보네 고물상에 ‘털보 실업자 되는 날’이라는 종이가 나붙었다. 고물상에 쌓인 물건들은 하나둘 헐값에 팔렸다. 꼬맹이들 킥보드 안 필요한가? 아저씨는 웃으며 말했다. 어느 아침에는 인부들이 간판을 떼어내고 있었다. 그날 저녁에 고물도 간판도 사라진 깨끗한 고물상을 봤다. 의자 하나 남은 가게 안은 형광등이 환했다. 털보 아저씨가 혼자 앉아서 소주를 마시고 있었다.
여름날 뒤적거리며 사 먹던 아이스크림을, 철마다 드라이클리닝을 맡기던 겨울옷을, 2만 원에 사 왔던 교자상과 5000원 더 깎아주어 신나서 들고 왔던 수납장을 생각했다. 환한 조명이 반짝이는 새 가게들과 앞으로는 활짝 열어둘 일 없는 문들을 생각했다. 장소가 없어지는 일은 쓸쓸하다. 하루아침에 갈 곳이 사라져 버렸다. 분명 그 안에 사람이 살았었는데, 누군가 아침저녁으로 생계를 꾸려나갔었는데, 동네 사람들이 들락거렸었는데. 모두들 어디로 갔을까. 이다지도 깨끗하게.
고물상 터에는 이후로도 두어 번 가게가 들어섰다가 사라졌다. 문을 걸어 잠근 고물상 터를 지나면 종종 들르던 돈가스 가게가 있다. 개업 첫날 조리모를 쓴 주인이 돼지머리에 빳빳한 돈을 끼워두고 고사 지내는 모습을 지켜봤었다. 봄마다 길운을 염원하는 ‘입춘대길(立春大吉)’을 손수 써 붙여두었던 돈가스 가게. 겨우내 문이 닫혀 있었다.
“코로나로 상황이 어려워져 겨울 동안만 다른 일 하고 돌아오겠습니다. 3월 오픈 예정입니다. 그동안 재정비하고 봄에 찾아뵙겠습니다.” 가게 앞을 오갈 때마다 주인이 써 붙여둔 손글씨를 지나치지 못했다. 어느덧 3월, 아무렇게나 전단이 쌓인 문간을 바라보며 소원을 빌듯 ‘입춘대길’하고 속삭여 보는 것이다. 다시, 봄에 만나뵙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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