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보다 미래를 (한일 관계의 방향으로) 지향하겠다는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의 생각은 전적으로 옳다. 일본은 한국의 새 대통령 취임을 기회 삼아 ‘1965년 한일 청구권 협정으로 (과거사 문제) 해결이 끝났다’는 완강한 입장을 수정할 용의가 있다는 시그널을 한국에 보내야 한다.”
2009년 54년 만에 집권 자민당을 끌어 내리고 민주당 정권의 초대 총리에 올랐던 하토야마 유키오(鳩山由紀夫) 전 일본 총리는 20일 본보와 인터뷰에서 이같이 강조했다. 또 “일본은 ‘미래를 보자’는 윤 당선인의 인식에 대해 과거 일을 잊고 미래에 대해서만 말하겠다는 식으로 받아들이면 안 된다”며 한일 관계 개선과 함께 과거사에 대한 일본의 진지한 반성이 함께 이뤄져야 할 필요성을 제기했다. “잘못된 역사 인식을 가진 일본과 감정적 비난으로 응수한 한국의 공방”으로 한일 관계의 토대가 무너졌다며 이런 잘못을 되풀이하지 말아야 한다는 점도 지적했다. 그는 미중 갈등 격화를 헤쳐 나가기 위해서라도 “전략적으로 한일 관계 개선이 필수”라고 강조했다.》
하토야마 전 총리는 윤 당선인에 대한 기대를 숨기지 않았다. 과거사 문제에서 일본의 사죄와 반성을 꾸준히 주장해 온 지한파 정치인이라서만은 아니다. 윤 당선인의 취임이 얼어붙은 한일 관계에 새로운 전기가 될 수 있다는 기류를 포착했기 때문이다.
실제 윤 당선인의 취임을 앞두고 한일 양국 간에 신중하게나마 ‘관계 개선을 꾀해 보자’는 생각을 공유하려는 모습이 엿보인다. 윤 당선인은 당선 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에 이어 두 번째로 11일 기시다 후미오(岸田文雄) 일본 총리와 통화를 하고 “한일 양국은 동북아 안보와 경제 번영 등 미래 과제가 많은 만큼 우호협력 증진을 위해 함께 협력해 나아가자”고 말했다. 윤 당선인과 기시다 총리는 빠른 시일 내에 만나자는 데도 의견을 같이했다고 일본 언론이 전했다. 일본의 주요 언론들은 윤 당선인의 주요 발언과 대통령 집무실 이전을 비롯해 새 정부의 주요 이슈에 대해 연일 상세히 보도하고 있다.
하지만 교도통신, NHK 등의 여론조사에서 여전히 일본 국민의 70% 이상은 ‘윤 당선인 취임 이후에도 한일 관계가 나아지지 않을 것’이라고 응답하며 부정적인 생각을 바꾸지 않고 있다. 과거사 문제, 무역 분쟁 등으로 겹겹이 쌓인 양국 간 갈등이 쾌도난마식으로 하루아침에 풀리지 않을 것이라는 점을 시사하는 대목이다.
동아일보는 하토야마 전 총리와 인터뷰를 갖고 향후 한일 관계가 나아갈 방향에 대해 들었다. 인터뷰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산 상황을 감안해 서면으로 진행했다.
―윤 당선인에 대해 잘 알고 있는지.
“윤 당선인의 대통령 당선을 진심으로 축하한다. 윤 당선인을 개인적으로 만나본 적은 없다. 하지만 윤 당선인이 검찰총장 시절 펼친 맹활약은 일본에도 잘 알려져 있다. 1965년 이후 최악의 한일 관계가 이어지는 상황에서 대통령에 취임하는 당선인의 리더십에 큰 기대를 걸고 있다.” ―총리 재임 당시 한일 관계를 회고한다면….
“총리 시절인 2009년 한국의 이명박 당시 대통령과는 ‘미래 지향’이라는 화두를 공유하고 있었다. 윤 당선인이 ‘과거보다 미래에 어떻게 하는 것이 양국에 이익이 되는지 잘 찾아 나가야 한다’고 말한 것은 전적으로 맞다고 생각한다.”
하토야마 전 총리는 취임 1개월여 만인 2009년 10월 방한해 이 전 대통령과 첫 정상회담을 했고 이후에도 수차례 회담을 했다. 2009년 정상회담 당시 일본에서 열풍이 불던 막걸리가 공식 건배주로 테이블에 올라 한일 양국에서 화제가 됐다. 하토야마 전 총리 부인은 일본 프로야구 요미우리 자이언츠에서 4번 타자로 활약하던 이승엽 선수를 초대해 저녁식사를 하며 한류에 강한 호감을 보이기도 했다. 지금 상황과 비교하면 격세지감이 느껴질 정도로 한일 간에 훈풍이 불던 시대였다. 이 전 대통령과 하토야마 전 총리는 퇴임 이후인 2015년 11월 서울에서 만나 “한일 관계가 지속적으로 발전하는 게 동북아 평화에 도움이 된다”고 의견을 교환했다.
―일본은 ‘미래를 보자’는 윤 당선인의 생각을 어떻게 읽어야 할까.
“현재와 미래는 과거의 토대 위에 서 있다. 윤 당선인의 한일 관계 인식에 대해 일본 측이 ‘과거의 일은 잊고 미래에 대해서만 말하겠다’는 식으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역사에 대한 인식, 특히 침략한 쪽(일본)의 진지한 반성 없이는 미래지향의 관계가 이뤄질 수 없다.
한편으로는 잘못된 역사 인식을 가진 일본과 감정적 비난으로 응수한 한국의 공방이 거듭됐다. 한국에 대한 일본인 전체의 감정이 악화돼 한일 관계의 토대가 무너진 현실도 부정할 수 없다.”
―윤 당선인의 취임 이후를 어떻게 예측하나.
“(여소야대의) 의회 상황이 있지 않나. 윤 당선인은 대통령 취임 이후에도 한국 내 지지 기반을 다져 가면서 정책을 펼치고 정치를 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한일 관계를 개선하려면 결국 역사 문제가 최대 쟁점이 될 텐데….
“한일 관계의 최대 현안인 징용공 문제는 이미 한국 대법원의 판결이 나와 있다. 한국에서 누가 대통령이 되더라도 (판결을) 무시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한일 양국이 머리를 맞대고 서로 타협할 수밖에 없다.
청구권 문제도 마찬가지다. 나는 개인의 청구권을 국가 간 조약으로 소멸시킬 수 없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아베 정권 이후 일본 정부는 ‘1965년 체결한 한일 청구권 협정으로 모두 해결됐다’는 입장을 갖고 있다. 윤 당선인이 이런 일본 정부의 주장을 무조건 받아들일 생각은 추호도 없을 것이다. 한국의 국내 정치 상황으로 봐서도 (한국의 무조건 양보는) 불가능하다. 한국의 새 대통령 취임이 (해결의) 타이밍이다. 일본 정부는 ‘기존 청구권 협정에 따라 해결됐다’는 완강한 입장을 수정할 수 있다는 신호를 한국에 전해야 한다.”
하토야마 전 총리는 역사 문제에 대해 ‘가해자인 일본이 반성해야 한다’는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 2009년 총리 취임을 전후로 과거사에 대해 “(자민당 정권과 달리) 역사 인식에서도 과거를 직시할 수 있는 정부가 될 수 있다”며 전향적인 모습을 보였다. 코로나19 이전 마지막으로 한국을 방문했던 2019년 10월 그는 부산대 강연에서 “폭력을 행사한 사람은 잊어도 피해자는 그 아픔을 잊을 수 없다. 전쟁 피해자가 더는 사죄하지 않아도 된다고 할 때까지 가해자는 사죄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며 일본의 반성을 촉구했다. 다만 하토야마 전 총리의 이런 생각은 자민당 집권 체제가 견고한 현재의 일본에서 소수 의견인 게 현실이다.
―격화되고 있는 미국 중국의 대립은 한일 관계에 어떤 의미가 있을까.
“동아시아는 물론 세계가 미중 대립의 한복판에 서 있다. 한국도 일본도 ‘미국과 중국 가운데 어느 한편에 서야 한다’는 것은 국익 관점에서 최악의 선택이다. 미국과 중국 양쪽과 잘 어울리며 미중 양국의 긴장을 억제하고 관리하는 것이 한일 공통의 국익이다.
미중 대립이 격화되는 상황에서 (이들 국가에 대한) 발언권을 가져야 한다는 관점으로 볼 때 지금의 한일 관계 냉각은 매우 좋지 않다. 윤 당선인에게도 기시다 총리에게도 전략적 의미에서 한일 관계의 개선이 필수 불가결하다고 말하고 싶다. 북한에 대해서도 기본적으로 (한일 양국이) 같은 말을 할 수 있어야 한다.”
―일본의 재무장이 한일 관계에 미칠 영향은 무엇일까.
“일본에서는 보수파를 중심으로 미일 동맹 강화와 군사력 증강에 힘을 쓰려는 움직임이 강해지고 있다. 중국이 위협하고 있기 때문에 이에 대응하기 위해서라는 논리다. 지금과 같은 냉각된 한일 관계가 계속되면 자칫 미래에 한일 양국이 군사적으로도 긴장을 갖는 시대가 오지 않을까 걱정된다. 이런 시기에 윤 당선인이 한국의 새로운 대통령으로서 한일 관계를 반전시켜 한일 신시대를 이끌어 내길 강하게 기대한다.”
―대선 이후 한국 사회가 극단적으로 분열됐다는 평가가 나오는데….
“그 부분은 새로 취임하는 윤 당선인이 (국내에서) 해결해야 하는 주요 과제이기 때문에 제가 답변할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하토야마 유키오는 누구?
제2차 세계대전 후 일본의 첫 정권교체를 이끈 하토야마 유키오 전 일본 총리는 1947년 도쿄에서 정치 명문가의 후예로 태어났다. 도쿄대 공학부를 종합하고 미국 스탠퍼드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후 1984년 집권 자민당 소속으로 정계에 입문했다. 1993년 탈당 후 민주당 결성을 주도했고 2009년 8월 총선 승리로 최초의 민주당 출신 총리가 됐다. 오키나와 미군기지 이전 논란, 고속도로 무료화 정책 등으로 안팎으로 비판을 받아 이듬해 총리에서 물러났지만 줄곧 과거사 문제 해결을 위한 진정성 있는 태도를 보여 호평을 받았다. 2015년 8월 서울 서대문형무소 추모비 앞에서 무릎을 꿇고 사죄하는 등 ‘일본이 가해 역사를 사과해야 한다’는 태도를 견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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