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국의 주권과 영토를 짓밟고 숱한 인명을 살상한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사태는 국가안보의 중요성과 국제정치의 냉혹한 현실을 뼈저리게 증명한다. 평화는 문서나 협정으로 지킬 수 없고, 안보 방심은 국가 존망의 위기로 직결된다는 교훈을 새삼 일깨워주고 있다.
한국은 우크라이나와 지정학적 여건이 다르고 국력도 강해 과도한 불안감을 가질 필요가 없다는 주장도 있다. 하지만 핵을 거머쥔 독재자가 얼마나 위험한지를 보여준 점에서 결코 남의 일이 아니라는 게 필자의 생각이다. 국제사회의 비난과 반발을 깡그리 무시한 채 전쟁을 일으킨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야만성과 오판이 북한 김정은의 대남 위협과 ‘오버랩’된다는 경고를 흘려들어선 안 된다는 얘기다.
북한의 핵위협이 사실상 ‘임계점’을 넘은 데다 연초부터 몰아친 미사일 연쇄 도발이 대남 핵타격력 고도화를 노린 김정은의 ‘작품’이란 점에서 더욱 그렇다. 유사시 북한판 이스칸데르(KN-23)와 극초음속미사일 등에 수 kt(킬로톤·1kt은 TNT 1000t의 폭발력)급 전술핵을 실어 파상 공세에 나설 경우 한미 요격망으로 완벽한 방어가 불가능하다.
국내외 연구기관에 따르면 20kt급 핵탄두 1발만 서울에 떨어져도 수십만 명의 사상자가 발생하고, 폭발 반경 10km 안팎이 황폐화된다. 북한이 6차 핵실험에 사용한 수백 kt급 수소폭탄은 서울을 절멸시켜 석기시대로 되돌릴 수 있다.
이에 대해 친정부 성향의 일부 전문가들은 “북한이 설마 핵을 쓰겠냐”면서 과도한 ‘북핵 공포증’이라고 일축한다. 하지만 그간 김정은은 핵공격을 누차 협박한 데다 유사시 미 증원전력이 들어오는 한국의 공항·항만에 대한 핵타격 훈련까지 직접 지휘했다. 최근 사석에서 만난 주한미군 관계자는 “미 국방부는 김정은의 핵 사용을 가능성 차원을 넘어 기정사실로 보고 있다”고 말했다. 지난해 12월 한미 국방장관이 연례안보협의회의(SCM)에서 연합 작전계획(OPLAN) 수정에 합의한 배경에도 전시(戰時) 북한의 핵공격 위협에 대한 위기감이 깔려 있다는 것이다.
우크라이나 사태는 ‘동맹 없는 평화’의 취약성도 여실히 보여준다. 2014년 러시아에 크림반도를 빼앗긴 우크라이나가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에 가입했거나 미국과 군사동맹을 맺었다면 최악의 상황은 막을 수 있었을 것이다. 자유 민주주의 가치에 기반한 군사동맹이야말로 가장 큰 억지력임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북한의 위협뿐만 아니라 중국의 패권 확대 압력에 직면한 한국에 주한미군의 가치는 더 말할 나위가 없다. 즈비그뉴 브레진스키 전 미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은 저서인 ‘거대한 체스판’에서 “남북 간 전쟁 위협이 상존하는 한 (주한)미군은 한국에 있어야 한다”며 “주한미군이 없는 통일 한국은 중국의 정치적 영향권이나 중국의 권위가 교묘하게 존중되는 권역 안으로 빠져들 것”이라며 그 중요성을 강조한바 있다.
한번 허물어진 안보태세는 돌이킬 수 없다는 교훈도 간과할 수 없다. 우크라이나는 냉전 해체 이후 국제적 군비 축소와 평화 기류 속에서 병력을 감축했고, 2009년 금융위기로 국방 예산이 부족해지자 잉여 무기를 해외에 대거 매각하는 자충수를 뒀다. 이는 훈련 부족과 전투력 저하로 이어졌다. 2018년 남북·북-미 정상회담 이후 3대 연합훈련을 모두 폐지하고, 매년 두 차례의 연합 지휘소연습(CPX)마저 북한 눈치를 살피느라 축소 중단해온 우리 안보현실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연합훈련 파행을 이대로 방치할 경우 대비태세 저하와 심각한 안보공백이 현실로 닥치는 것은 시간문제일 뿐이다.
북한은 우크라이나가 냉전 해체 이후 미국의 꼬임에 넘어가 핵을 폐기하는 바람에 작금의 사태가 초래됐다고 판단하고 앞으로 핵 보유에 더 집착할 것이 자명하다. 미국과 서방세계의 패권주의 정책 탓이라면서 국제무대에서 러시아의 만행을 지지하는 북한의 행태는 핵무장을 정당화하려는 얄팍한 ‘잔꾀’일 뿐이다. 북한의 핵포기가 요원해질수록 한미동맹에 기반한 강력한 억지력 구축만이 유일한 해결책이다. 새 정부는 북한의 핵무력 고도화 실태를 철저히 파악해서 한미 요격망과 확장억제 강화 등에 만전을 기하길 바란다. 안보 전략을 치밀하게 가다듬어 국민의 생존과 영토를 수호하는 것은 국가의 존재 이유이자 최우선 책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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