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기 창업자를 지원하고 육성하는 일을 업으로 하는 한 액셀러레이터 대표가 불쑥 질문을 던졌다. 스타트업이야 늘 돈과 사람에 궁한 입장이니 대기업의 투자를 반기고 환호하는 것은 당연한 게 아니냐고 했지만 실제는 달랐다. 구글이나 애플 같은 외국 기업으로부터 미팅 제안을 받으면 자랑하느라 바쁘지만 국내 대기업의 제안은 선뜻 받아들이지 못하고 주저한다는 것이다.
다소 의외였지만 이유는 이렇다. 국내 대기업들은 투자하는 순간부터 스타트업을 파트너로 여기지 않고 점령군처럼 행세한다는 것이다. 전략적 협업을 하자고 해서 투자를 받았는데 지배하고 통제만 하려 드니 오히려 스타트업의 생명인 스피드와 혁신성을 잃는다고 했다. 외국계 기업의 투자를 받아 본연의 경쟁력이 커지는 것과는 반대로 대기업 투자를 받고 망가지는 경우도 적지 않다. 스타트업과의 협업에 진심인 대기업도 있고 실제 협업을 통해 윈윈하는 사례도 있는 걸 보면 대기업의 투자를 일방적으로 매도할 수는 없다. 하지만 오랫동안 한국 산업계의 갑이었던 한국 대기업이 신생 스타트업에는 그 존재 자체로 부담이라는 점은 수긍할 만하다.
이런 이야기를 전해 들은 한 대기업의 스타트업 투자 담당자들은 다듬어지지 않은 스타트업의 부족한 2%를 지적한다. 대기업이 스타트업에 투자하려면 다양한 리스크 요인을 분석해야 하고 이를 위한 근거 자료인 많은 데이터와 문서 작업이 필요한데 스타트업의 역량은 대기업의 기대 수준을 밑돈다는 주장이다. 하지만 혁신적인 상품이나 기술을 가졌을 뿐 이제 갓 태어난 종업원 10여 명의 구멍가게에 너무 대기업다운 시스템을 기대하는 건 아닌가 싶다.
국내 대기업과 스타트업의 서로에 대한 평가가 이처럼 엇갈리는 듯해도 둘 사이의 협업은 이미 거스를 수 없는 대세다. 특히 내부에서 혁신의 불씨를 찾기 힘든 대기업들이 역량 있는 혁신 스타트업과 손을 잡는 오픈 컬래버레이션에 더 적극적이다. 실제로 스타트업 투자업계에 따르면 국내 100대 기업 중 절반 이상이 기업주도형 벤처캐피털(CVC)을 설립했거나 스타트업 투자 담당 조직 구성을 검토하고 있다. 비단 우리만의 사정은 아니다. 글로벌 500대 기업들의 평균수명이 1960년대 60년에서 2000년대 들어 25년으로 줄어든 걸 보면 혁신과 신성장동력을 확보하지 못한 채 기존 산업에 안주하면 도태된다는 위기감은 전통 대기업들의 공통된 인식이다.
하지만 대기업과 스타트업의 협업이 더 활발해지려면 오랫동안 한국 경제의 주인공 역할을 해온 대기업의 시각 교정이 우선 필요해 보인다. 거대한 시스템과 규모의 경제 논리에 집착하는 한 저성장과 불확실성이 일상이 된 새로운 무대에서 더 이상 주인공이 되기 어렵다. 주변의 파트너를 을로 보고 나 홀로 독식하려는 인식부터 수정해야 한다. 대기업이 스타트업을 바라보는 눈높이를 낮추고 유연해질수록 대기업에 더 많은 기회가 생길 수 있다. 그래야 국내 스타트업 투자 생태계가 건강해지고 대한민국 경제도 활기를 띠고 더 많은 일자리도 생겨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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