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화 이후 정권 교체가 가능해지면서 문서 파기를 둘러싼 신구 정부 간의 갈등이 반복되고 있다. 여야 간 첫 수평적 정권교체가 된 김대중 정부 출범 직전이 가장 정도가 심했다. 당시 국가정보원의 전신인 국가안전기획부가 새 대통령 취임 전 2, 3개월 동안 문제가 될 만한 서류를 태우느라 국정원 청사 주변 하늘이 새까만 연기에 뒤덮였다는 풍문이 나돌기까지 했다.
▷윤석열 대통령직인수위원회가 지난달 29일 “전자·종이 문서와 보고서 등을 무단으로 파기하지 말라”는 취지의 공문을 국정원과 각 정부 부처, 위원회 등에 보냈다. 업무용 컴퓨터나 하드 교체, 자료 무단 삭제도 금지했고, 문재인 정부가 추진해 온 정책과 관련한 방침 자료마저 지우지 말라고 했다. 인수위는 “적폐청산을 위한 사전 정지 작업은 아니다”라고 했지만 더불어민주당은 “전형적인 점령군의 태도”라고 반발하고 있다.
▷요즘 정부 부처는 거의 100% 전자문서로 결재한다. 문서 파일과 작성 주체, 보고 라인, 파기 여부 등도 서버에 남는다. 그렇다고 문서 삭제가 불가능한 건 아니다. 월성 원자력발전소 조기 폐쇄에 대한 감사원 감사를 앞둔 2019년 12월 산업통상자원부 공무원들이 청와대(BH) 보고 문건을 덮어쓰기 형태로 삭제한 것이 대표적인 사례다. 서버를 통째로 바꾸거나 하드디스크를 교체하는 것도 전자문서를 파기하는 방법 중 하나다.
▷2017년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직후 국정원 내부에선 정권교체 전에 내부 서버를 폐기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왔다고 한다. 국정원장이 결재를 하지 않아 이 계획은 없던 일이 됐다. 문재인 대통령 취임 일주일 뒤인 같은 해 5월 16일 당시 조국 대통령민정수석비서관은 국정원 등과의 상견례 자리에서 ‘문서 무단 파쇄나 유출, 삭제 금지’를 지시했다. 곧 외부 인사가 참여한 국정원 적폐청산TF는 내부 서버에 있는 문서를 근거로 감찰을 했다. 박근혜 정부 청와대에서 작성한 문서를 캐비닛에서 찾았다며 검찰에 수사를 의뢰했다.
▷노무현 정부 시절인 2007년 대통령기록물법이 제정돼 대통령의 정책 결정 과정을 알 수 있는 주요 기록물에 대한 공식 이관 절차가 생겼다. 하지만 이명박 정부는 “노 정부가 남긴 자료 중에 쓸 만한 게 없다”고 불만을 터뜨렸다. 노 전 대통령이 봉하마을로 가져간 이지원(e-知園)을 회수해 갔고, 거기에 남아있던 남북정상회담 회의록의 내용을 놓고 신구 권력이 충돌했다. 후진적인 문서 파기 논란을 이제는 끝낼 때가 됐다. 어차피 복원될 문서를 어설프게 삭제하는 공무원이 더 나와선 안 될 것이다. 새 정부도 필요 이상으로 현 정부를 자극하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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