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건 금세 사라진다[내가 만난 名문장/마녀체력]

  • 동아일보
  • 입력 2022년 4월 4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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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체력(필명) ‘걷기의 말들’ 작가·생활체육인
마녀체력(필명) ‘걷기의 말들’ 작가·생활체육인
“펑! 튀밥 튀기듯 벚나무들,/공중 가득 흰 꽃팝 튀겨 놓은 날/잠시 세상 그만두고/그 아래로 휴가 갈 일이다.”

―황지우 ‘여기서 더 머물다 가고 싶다’ 중


서울 한 귀퉁이에서만 30년 가까이 살았다. 사람들은 그런 나더러 바보라고 한다. 애당초 돈 벌기는 글렀다고 말한다. 하긴 집을 요리조리 옮기며 평수를 늘려 가야 부자가 되는 법이다. 도대체 왜 이사를 가지 못했냐고? 모르는 소리 마라. 못한 게 아니라, 안 한 거다.

우리 집 코앞에 수영장이 있다. 그 2층은 실내 배드민턴 코트다. 횡단보도만 건너면 자전거 길로 이어진다. 운동을 하기에 딱 좋은 환경이란 소리다. 덕분에 우리 집 식구는 다들 물속에서, 코트에서, 자전거 안장 위에서 활개를 친다. 내가 괜히 마녀체력이 되었겠는가.

하지만 가장 큰 자랑거리는 따로 있다. 벚나무가 4km쯤 이어진 산책길이다. 해마다 벚꽃 철이면, 눈이 시리도록 꽃망울을 터뜨린다. 튀밥 튀기듯, 팝콘 터지듯. 그야말로 온통 ‘꽃팝’ 천지다. 꽃구경 한답시고 머나먼 진해까지, 복잡한 여의도까지 갈 필요가 없다.

아름다운 건 금세 사라진다. 꽃이 절정으로 치닫는 날은 겨우 사나흘뿐. 그 시간을 놓치지 않으려고, 나는 아침저녁으로 나가서 벚꽃 길을 걷는다. 바쁜 일을 접어 두고, 생계도 저만치 밀어 놓는다. 시인의 말처럼, 잠시 세상 그만두고 휴가라도 온 듯이 그 순간을 만끽한다. 그까짓 벚꽃, 내년에 또 필 텐데 뭐가 그리 대수냐고? 코로나 탓에 살갗으로 겪지 않았나. 당연하게 여겨온 일상이 무너졌다. 사람을 못 만나고 여행도 못 간 채, 3년이라는 세월을 그냥 잃어버렸다. 지금 피어난 벚꽃을 놓치면, 다음 기회가 또 올 거라고 누가 장담하겠는가.

벚꽃이 만개할 것이다. 꽃 터널을 올려다보며, 나는 좋아서 입을 벌리고 웃겠지. 이런 천국을 두고, 딴 데로 이사를 가라고? 흥, 누가 더 바보인지 모르겠네.

#서울 귀퉁이 집#벚나무 산책길#마녀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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