꿀벌이 사라졌다. 벌을 키우는 양봉농가 수천 곳에서 갑작스레 자취를 감췄다. 정부 통계에 따르면 이미 60억∼70억 마리가 사라졌다. 올 초 남부지방부터 시작해 전국적으로 확산됐다. 우리나라에서는 최근 벌어진 일이지만 지구촌으로 눈을 돌리면 하루 이틀의 일은 아니다. 미국에서는 2006년 집단 실종이 처음으로 보고됐다. 2017년에는 2035년이면 꿀벌이 멸종할 수 있다는 유엔의 경고가 있었다.
인류가 벌꿀을 채집한 역사는 무척 길다. 수천 년 전 동굴벽화에도 그려져 있다. 꿀은 설탕과 더불어 단맛을 내는 대표 음식이다. 썩지 않고 오랫동안 보관할 수 있다. 우리의 사랑을 듬뿍 받아왔고, 많은 음식에 꿀이 들어간다. 꿀벌이 없으면 꿀도 사라진다. 사랑 받는 음식 하나가 없어진다. 과연 그것이 전부일까? 2019년 미국의 한 기업이 뉴욕 식당들과 함께 꿀벌이 없을 때의 식탁을 꾸며봤다. 아몬드나 아보카도, 자몽, 오이가 사라졌다. 커피도 즐길 수 없다.
꿀벌은 꽃가루를 옮기고 열매를 맺게 한다. 그 대가로 꿀을 얻는다. 그러니 꿀벌이 없다면 열매를 맺는 재료의 음식은 모두 맛볼 수 없다. 꽃이 없어도 되는 뿌리채소만 식탁에 올라온다. 여기서 끝나면 다행이다. 뿌리식물은 땅속에서 계속 자란다. 하지만 땅 위의 식물은 찾아보기 어렵고, 풀을 먹는 소는 더 이상 먹이를 찾을 수 없다. 소고기가 사라지고 우유와 치즈, 피자도 없다.
몇 년 전 선풍적인 인기를 끈 영화 ‘인터스텔라’는 노벨상 수상자를 비롯한 물리학자들이 자문과 검증을 했다. 그 덕분에 물리학계에서는 상대성이론이나 블랙홀 등 과학법칙에 오류가 거의 없는 공상과학영화로 칭송받았다. 하지만 생명을 연구하는 학자들에겐 재앙 수준이다. 지구상의 생명체 몇을 데리고 새로운 별로 이주한다. 그곳에 지구와 동일한 환경을 만들어 인류가 정착하는 미래를 그린다. 지구에 사는 동식물의 종류가 얼마나 되는지 정확히 모른다. 여전히 우리가 모르는 생명체가 많고, 새로이 생기거나 멸종되는 종도 있다. 꿀벌 하나가 빠졌을 뿐인데 식탁이 텅 비었다. 모든 생명체는 서로 복잡한 먹이사슬로 연결되어 있다. 그러니 영화처럼 몇 종류의 동식물만으로 지구가 재현될 리 없다.
자연에서 사라지는 것은 비단 꿀벌만이 아니다. 동물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곤충은 더 심각하다. 아직 우리가 찾지 못한 곤충도 많다. 많은 동물이 곤충을 먹고 산다. 매년 곤충의 2.5%가 사라진다는 보고가 있다. 그 외에도 많은 동식물이 사라지고 있다.
이런 현상이 왜 생기는지는 아직 정확히 모른다. 아마도 한두 가지로 설명할 수 없는, 복합적인 일이 일어나고 있을 것이다. 치명적인 병이나 벌레가 생겼을 수 있다. 외국에서 새로운 종이 들어와 생태계를 장악한 탓도 있다. 우리가 뿌려댄 농약도 범인으로 의심받는다. 인간이 만들어온 문명은 다른 동식물들에게 큰 위협이다. 인간은 동식물이 살 공간을 계속 없앤다. 농사를 짓기 시작하며 논밭을 가꿀 때부터 인위적인 환경을 만들었다. 자연환경 파괴의 시작이라 할 수 있다. 갈수록 도시는 커지고 세계 인구는 늘어간다. 더욱 많은 식량이 필요하다. 최근에는 기후변화까지 더해졌다.
위기를 기술로 극복하려는 노력이 있다. 사라지는 꿀벌을 대신하는 로봇벌을 연구한다. 남극의 빙하가 녹아내리는 기후변화를 막으려는 탄소중립이 진행 중이다. 지구온난화는 인간이 만들어낸 이산화탄소 탓이다. 만든 만큼 흡수하는 방법을 찾아 실질적인 탄소배출량을 0으로 만드는 것이 탄소중립이다. 하지만 환경을 보호하고 지구를 살리는 노력은 삶의 편안함이나 물질적 풍요와 다소 거리가 있다. 그간 당연하게 누리던 것을 상당 부분 포기해야 한다. 당장 이번 달부터 모든 식당과 카페에서 일회용품 사용이 금지되는 사소한 불편이 있다. 아낌없이 쓰던 전기의 편리함을 포기해야 한다. 결국 산업이나 문명을 얼마나 내려놓고, 그 대신 환경과 기후를 지킬 것이냐는 선택의 기로에 서 있다.
탄소 중립을 위한 기술개발은 더욱 열심히 해야 한다. 하지만 기술만을 앞세워 탄소중립을 할 수는 없다. 탄소 배출이 전혀 이루어지지 않고, 나아가 그간 뿜어 놓은 수많은 오염물질을 없애버리는 획기적인 기술이 나올 가능성은 희박하다. 얼마나 많은 삶의 혜택을 포기할지, 얼마나 빨리 탄소중립에 이를지 사회적 합의가 이뤄져야 한다.
한편 기후변화에 맞춰 적응하는 노력도 필요하다. 탄소중립은 단기간에 이뤄지지 않는다. 문명을 완전히 포기하지 않는 한, 영원히 달성할 수 없는 목표일지도 모른다. 이미 기후변화는 미래의 일이 아니라 현재진행형이다. 후손에게 떠넘길 것이 아니다. 매년 변화를 느낄 만큼 진행 속도도 무척 빠르다.
꿀벌이 아니라도, 기후변화 탓에 이미 식탁은 변하고 있다. 이제 사과는 대구가 아니라 강원도에서 자란다. 바나나, 파인애플은 더 이상 동남아 과일이 아니다. 원양어선의 참치가 우리나라에서도 잡힌다. 기후변화 이후의 세상에서는 식생활뿐 아니라 산업, 에너지, 환경 정책도 바뀌어야 한다. 기상재해도 더욱 자주 일어난다. 이에 맞춰 시설물의 안전기준도 변해야 한다. 방파제를 더욱 높이고 혹독한 가뭄에도 미리 대비할 필요가 있다. 서둘러 바뀐 세상에 적응해야 한다.
탄소중립은 지구를 위한 게 아니다. 인간이 오랫동안 지구에 살아남기 위함이다. 설령 인류가 멸망하더라도 지구는 사라지지 않는다. 결국 우리를 위한 노력이다. 이미 변화는 미래가 아닌 현실이다. 이론으로만 접근하거나 이상만을 좇을 것이 아니다. 상황에 맞는 적응과 대응이 절실하다. 꿈에서 깨어나 현실을 바라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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