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출간된 문재인 대통령의 연설문집 제목은 ‘아무도 흔들 수 없는 나라’다. 현실은 책 제목처럼 멋지진 않다. 중국의 사드(THAAD·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보복, 일본의 반도체 소재 수출 규제, 지난해 요소수 사태마다 혼란이 있었다. 아무도 우리를 건드릴 수 없다는 ‘정신 승리’보단 강대국이 기침하면 우린 독감에 걸리는 현실을 직시하고 위험에 대비해야 위기에서 흔들리지 않는다.
아무도 흔들 수 없는 나라는 세계 최고 군사력과 기축통화인 달러를 보유한 미국을 빼면 사실상 없다. 북한이 핵보유국이라고 거들먹거리고 한국이 주요 7개국(G7)을 능가하는 경제적 성과를 냈다고 뽐내도 아무도 흔들 수 없는 나라로 쳐주진 않는다. 세계 제2의 군사대국이자 세계 10위권의 경제 규모를 가진 러시아 역시 미국과 서방이 금융과 에너지 제재로 흔들면 흔들리는 게 현실이다.
2010년대 중반 이후 관세 철폐와 자유무역을 중시하는 세계화가 후퇴했다. 세계화 시대에 건설된 물류와 공급망 인프라, 에너지, 핵심 기술 등과 관련한 국가 간 상호의존성은 경제 인프라를 안보의 전략무기로 동원하는 경제안보 시대의 급소가 됐다. 중동산 원유를 실어 나르는 호르무즈 해협과 지중해 홍해 인도양을 잇는 무역로인 수에즈 운하 등 급소지역(choke point)이 막히면 세계 물류동맥이 끊어지는 것처럼 반도체나 5세대(5G) 통신기술, 벨기에에 거점을 둔 국제금융결제망(SWIFT) 등은 시장을 일거에 무너뜨릴 수 있는 세계 경제의 급소 인프라다.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경제안보의 현실적 목표는 ‘아무도 흔들 수 없는’ 미국과 같은 나라보다는 핵심 기술, 기업, 인재 등의 급소 인프라를 지켜 ‘아무나 흔들 수 없는’ 고슴도치와 같은 나라를 만드는 일이다. 수백, 수천 개 전략 품목을 일일이 관리하는 건 현실적으로 어렵지만 상대방의 핵심 이해관계가 걸려 있는 급소기술이나 급소기업을 보유하고 있으면 상대가 만만하게 보지 못한다. 우크라이나 사태에서 보듯이 자국의 핵심 이익이 걸려 있지 않으면 국가 간 분쟁에 개입하지 않는 게 국제사회의 현실이다. 한국의 삼성전자, 대만의 TSMC와 같은 급소기업은 패권경쟁의 타깃이자 경제안보를 지키는 인계철선 역할을 하고 있다.
경제안보의 핵심은 통상을 누가 맡느냐가 아니다. 외교 따로, 통상 따로, 산업 따로 노는 칸막이를 없애고 국가의 힘을 결집하는 컨트롤타워를 대통령이든 국무총리 밑에 두고 급소 인프라를 관리하는 일부터 해야 한다. 지난해 요소수 사태에서 중국의 요소 수출 의무화 고시에 대한 늑장 대응의 원인은 사태 초기 현지 공관에서 이 문제를 차량용 요소가 아닌 농업용 ‘요소 비료’의 문제로 인식했기 때문이다. 시장과 산업에 대한 이해가 없으면 경제안보의 조기 경보조차 불가능하다. 외교부나 산업통상자원부 밖에도 대안이 있다. 세계 기술과 투자 동향 등을 파악하고 산업의 급소와 위험을 조기에 감지할 수 있는 특허청의 특허정보 인프라 등도 적극 활용할 필요가 있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은 2014년 5월 상하이 시찰에서 “과학기술창조혁신의 ‘급소’를 잡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지난해 3월 미 인공지능 국가안보위원회(NSCAI)는 의회에 중국이 미국의 반도체 산업을 따라잡지 못하게 반도체 제조 기술의 ‘급소’를 조여야 한다고 건의했다. 강대국들은 서로의 급소를 노리며 한 방을 준비하고 있는데 우리는 정권이 바뀔 때마다 통상을 붙였다 뗐다 하며 밥그릇 싸움에 시간을 허비하고 있다. 이런 적전 분열이 되풀이되면 ‘아무나 흔들 수 있는 나라’로 전락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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