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력 예보를 미리 내놓는 방안을 검토하겠다.” 3일 일본 NHK의 토론 프로그램에 출연한 하기우다 고이치(萩生田光一) 경제산업상은 최근 세계 3위 경제대국 일본에서 전기 공급이 모자라 ‘블랙아웃’(대정전) 사태가 벌어질 뻔한 상황에 대한 향후 대책을 이렇게 답했다. 그는 정부가 전기가 부족할 것이라는 정보를 너무 늦게 알려줘 국민 불편이 가중됐다는 여론의 질타를 의식한 듯 “전력 부족 경보가 늦어지는 일을 되풀이하지 않겠다”고 몸을 낮췄다.》
지난달 16일 일본 후쿠시마현 앞바다에서 발생한 규모 7.4의 강진으로 발전소 일부가 가동을 중단하면서 일본의 전력 부족 위기감이 커지고 있다. 2011년 3·11 동일본대지진 이후 상당수 원자력발전소의 가동이 멈추고 기존 화력발전의 노후화도 심해져 일본은 이미 10년 넘게 전력 공급이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다. 이 와중에 잇따른 지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인한 국제 유가 급등 여파로 전력 부족이 더 심각해질 것이란 우려가 나온다.
특히 덥고 습하기로 유명한 일본의 여름을 맞아 냉방 수요가 급증하면 정전 위기가 반복될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탈(脫)원전 중심의 에너지 정책으로 전력 수급에 문제가 없다고 하기 어려운 한국에서도 마냥 남의 일로만 볼 수 없는 이유다.
빛 잃은 도쿄타워
이번 위기의 최대 원인은 지진에 따른 화력발전소 가동 중단이다. 지난달 지진에 따른 설비 이상으로 후쿠시마현의 히로노화력, 신치화력 등 6기의 화력발전소(총 334만7000kW)가 멈췄다. 이 여파로 지난달 21일 밤 도쿄 일대의 전력 공급을 담당하는 도쿄전력은 전력 부족 위기 경보를 발령했다. 2011년 동일본대지진 이후 만들어진 이 제도가 실제로 쓰인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일본의 전력 위기 경보는 전력 공급 예비율이 3%를 밑돌 것으로 예상될 때 발령된다. 한국은 전력 예비율이 10% 이하로 떨어지면 수급 관리에 나서고, 에어컨을 가장 많이 트는 한여름에 예비율이 4% 밑으로 떨어질 가능성이 보이면 비상 대응에 나선다.
하루 뒤인 같은 달 22일 동아일보 도쿄지사가 위치한 도쿄 주오구 아사히신문 본사에는 “오늘 정부에서 전력 수급 위기 경보를 발령했다. 사용하지 않는 전등을 끄고 냉난방 설정 온도를 낮춰 달라”는 안내 방송이 나왔다.
주요 관공서와 대기업 등도 일제히 절전에 동참했다. 이날 도쿄도청은 청사 엘리베이터 일부의 운행을 멈췄고 복도 조명을 절반가량 껐다. 국토교통성은 온종일 청사의 난방 공급을 중단했다. JR동일본, 도쿄메트로 등 철도회사 또한 역내 에스컬레이터와 티켓 자동판매기의 가동을 일부 중단했다.
이날 도쿄는 도시 전체의 불이 꺼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도쿄의 명물 도쿄타워에서는 특유의 오렌지색 조명이 사라졌다. 요도바시카메라, 빅카메라 등 도쿄의 대형 가전제품 양판점에서도 외부 네온사인과 진열대에 놓인 TV를 껐다. 세븐일레븐 등 주요 편의점은 간판 조명의 전원을 내렸다. NHK 역시 공영방송답게 스튜디오의 밝기를 평소보다 대폭 낮췄다. 이날 NHK 뉴스는 하루 종일 어두컴컴한 배경으로 방송됐다.
절전 캠페인 효과 미미
강도 높은 절전 캠페인에도 불구하고 전력 소비는 예상보다 줄지 않았다. 지난달 21일 도쿄의 낮 최고 기온이 2도에 머무는 꽃샘추위가 나타나 난방 수요가 대폭 늘어난 탓이다. 여기에 비까지 내리면서 도쿄전력 관내에 있는 1800만 kW 규모의 태양광발전이 제대로 가동되지 못했다.
위기 경보 후에도 전력 사용률이 107%까지 올라 전기 공급이 부족해지자 도쿄전력은 긴급 상황 때 사용하는 양수발전소를 가동하고 민간 발전소의 전기까지 끌어 왔다. 그런데도 도쿄 인근 지바와 사이타마, 지난달 지진이 일어났던 도호쿠 지역의 후쿠시마와 이와테 등에서 일부 정전이 발생했다.
시민들은 불편을 호소했다. 도쿄의 한 백화점 관계자는 기자에게 “지금은 한여름이나 한겨울처럼 냉난방을 대대적으로 가동하는 시기가 아니어서 설정 온도를 조정해 봤자 절전 효과가 크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한 자동차업체 사원 역시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산 방지를 위해 재택근무를 하는 직원이 많아 평소에도 회사 PC 및 조명을 꺼두는 편”이라며 절전 캠페인에 동참하고 싶어도 딱히 할 게 없었다고 했다.
원전 축소도 전력 위기 부추겨
후쿠시마 원전 사고 이후 급격한 원전 비중 축소, 신재생 에너지의 비효율 또한 이번 전력난을 부추겼다는 분석이 나온다. 일본은 후쿠시마 사고 이후 전국 54기의 원전 가동을 전면 중단했다. 11년이 흐른 지금 재가동 중인 원전은 10기에 불과하다. 한때 원전은 일본 전력 생산의 3분의 1을 담당했지만 지난해 원전 비중은 불과 6.2%였다.
원전 비중을 대폭 낮춘 일본은 액화천연가스(LNG) 화력발전, 태양광 등 신재생 에너지 비중을 늘렸다. 하지만 이번 위기에서 보듯 태양광발전은 악천후에 취약한 모습을 드러내 ‘재해 대국’ 일본의 에너지 공급에 아킬레스건이 됐다.
게다가 과거 고도성장기에 건설한 노후 화력발전소들이 잇따라 폐기되면서 가뜩이나 허약한 공급망에 구멍이 생기고 있다. 경제산업성에 따르면 2016년부터 현재까지 노후화로 문을 닫은 화력발전 규모는 102만 kW로 원전 1기분에 달한다. 2025년까지도 441만 kW의 화력발전 공급이 감소할 것으로 보여 우려를 낳고 있다.
최대 경제단체 경단련(經團連)의 도쿠라 마사카즈(十倉雅和) 회장은 “당장의 전력 위기를 해결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중장기적 대처를 소홀히 하면 안 된다”며 안전성이 증명되고 현지 주민의 이해를 얻은 원전을 신속히 재가동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니혼게이자이신문의 최근 여론조사에서도 ‘안전이 확보된 원전을 재가동해야 한다’는 응답이 53%로 ‘재가동 불가’(38%)를 훌쩍 넘어섰다.
위기는 끝나지 않았다. 재가동 기약이 없는 원전, 노후화된 화력발전, 효율성이 의심되는 신재생 에너지, 언제 다시 발생할지 모르는 지진 등으로 일본의 전력 위기는 현재 진행형이다. 지진 우려가 상대적으로 덜하다는 것을 제외하면 한국 역시 일본보다 나은 상황이라고 장담할 수 없다. 평소에는 공기처럼 존재감을 느끼지 못하지만 한번 터지면 경제와 사회 전반에 막대한 악영향을 미치는 게 전력 문제다. 일본의 전력 위기를 반면교사로 삼아야 하는 이유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