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적 제도가 한번 만들어지면 여간해선 바꾸기 어렵다. 앞선 제도에 맞춰 다른 제도나 관습이 만들어지니 나중에는 비효율적인 줄 알아도 하던 대로 계속 하게 된다. 사회과학에선 이를 경로의존성(path dependency)이라고 부른다.
정책을 결정하고 입안할 때도 이 경로의존성이 작용한다. 문재인 정부 출범 이후 부동산 정책이 그랬다. 문재인 정부는 2017년 8·2부동산대책에서 ‘집값 안정 방안’의 첫 포문을 다주택자를 겨냥한 양도소득세 강화, 서울 강남권 재건축을 겨냥한 재건축 초과이익환수제(재초환)로 열었다. 그 순간 이후의 부동산 정책이 결정됐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다주택자의 양도차익은 인정할 수 없다’, ‘강남 재건축의 개발이익은 공공의 몫이다’란 ‘경로’를 정해 두고 정책을 밀어붙이기 시작한 것이다.
집값 상승기가 온 상황에서 양도세를 강화하니 다주택자들은 버티기와 증여로 일관했다. 보유세를 대폭 올리고 빨리 팔지 않으면 양도세를 더 올리겠단 엄포를 놨지만 오히려 ‘똘똘한 한 채’ 쏠림만 강화했다. 재초환으로 강남 재건축 사업에 제동을 걸고 이를 빠져나간 단지가 나오자 분양보증을 빌미로 분양가를 낮추도록 했다. 이마저 피해간 단지를 규제하기 위해 나중엔 민간택지 분양가상한제까지 도입했다. 기존 정책이 집값 안정이라는 진짜 목표를 달성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점을 수차례 확인하고도 이번 정부는 5년여 동안 경로를 수정하지 못했다.
경로의존성의 함정에는 누구든 빠질 수 있다. 일각에서는 곧 출범할 새 정부도 이 함정에 빠질 위험이 감지된다는 우려가 나온다.
그동안 ‘겹겹이 규제’가 시장을 왜곡해 왔으니 규제 완화라는 큰 방향은 옳다. 하지만 대통령직인수위원회에서 세제, 공급 방안, 대출 등 부동산 정책 전반에 관한 통일되지 않은 메시지가 나오면서 괜한 시장 기대감만 커지고 있다. 올해 들어 금리 인상 등 시장조건 변화에 힘입어 지속되던 서울 아파트 매매 가격 하락세는 결국 11주 만인 4월 첫째 주 들어 멈췄다. 알맹이 없는 공포탄만으로도 시장은 민감하게 반응한다.
대표적인 것이 부동산 세제 개편이다. 인수위에서 공식적으로 밝힌 세제 개편 방향은 1년간 양도세 중과 완화, 일시적 2주택자에 대한 종부세 완화뿐이다. 하지만 시장에선 6월 지방선거가 있으니 표심 달래기용 보유세 완화 방안도 나올 거라는 기대가 팽배하다. 공시가격 제도 개편 역시 보유세 완화의 한 방안으로 거론되기도 한다.
보유세까지 낮춘다는 신호를 주면 시장에 매물이 나오도록 유도하는 양도세 중과 완화의 효과는 떨어질 수밖에 없다. 공시가격 제도 역시 현재의 공시가격 산정 체계가 정당한지, 시세의 90%라는 현실화율 목표가 적정한지를 들여다봐야 한다. 보유세를 낮추는 것 자체가 공시가격 제도 개편의 목적이 돼선 안 된다.
인수위는 이달 안으로 부동산 종합대책을 내놓겠다고 밝혔다. 여론이나 지방선거에 신경 쓰기보다는 ‘시장 안정 및 정상화’라는 목적에 맞는 정책만 추려내는 결단이 필요하다. 그게 국민의 지지를 얻는 길이다.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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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4-09 11:13:16
재건축초과이익환수법의 폐지 내지는 대폭적인 완화없이는 양질주택의 대량공급은 어렵습니다. 이는 곧 서울과 수도권 부동산 가격의 하락은 기대하기 어렵다는 말과 동일합니다. 민주당이 의회다수당을 차지하는 2024년 총선이전까지는 어렵다는 말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