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6년 3월 21일 아침, 1200문의 독일군 대포가 일제히 불을 뿜었다. 오후 4시까지 지속된 포격은 베르됭의 요새와 참호, 프랑스군 포대, 철도를 뒤집어 놓았다. 1차 세계대전 때는 420mm, 380mm 대포도 있었다. 독일군은 1주일분으로 250만 발의 포탄을 준비했다.
가공할 화력보다 더 무서운 것이 독일군의 무시무시한 계획과 준비성이었다. 베르됭의 포격 전술은 4개월 후에 벌어지는 솜전투에서 영불 연합군이 사용한 포격 전술보다 더 정교하고, 더 파괴적이고, 더 선진적이었다.
독일군은 대포의 성능과 사정거리에 따라 정확하게 임무를 배당했다. 중포는 참호와 병사를 타격하고, 사정거리가 길고 속사가 가능한 야포로는 프랑스군의 포대와 병참선을 공격한다. 1차 포격이 끝나면 박격포로 방어 1선의 프랑스군을 다시 두들기고, 야포는 1선 후방에 탄막 포격을 개시, 1선으로 달려오는 증원부대를 공격한다.
적의 방어선이 뒤로 물러나면 즉시 포대를 앞으로 이동시켜 연속적인 포격 지원을 한다. 이때 예상되는 프랑스군의 대응 포격을 피하고 혼돈 없이 신속하게 이동하기 위해 포대 상호간에 지원 포격을 하며 이동한다.
모든 면에서 뛰어난 것은 아니지만, 1차, 2차 세계대전 중에 전술적으로나 조직력에서 선구적이고 뛰어났던 군대는 독일군이었다. 슐리펜 계획, 전격전 같은 혁신적인 전술만이 아니라 앞선 전투에서 얻은 교훈을 즉시 다음 전투에 적용하는 응용과 개량 능력에서도 독일군이 항상 앞섰다. 간단한 예를 들면 솜전투에서 영불 연합군은 베르됭에서 독일군이 보여준 개량 전술을 전혀 채용하지 못했다. 어디에서 이런 차이가 발생하는지는 모든 군사연구자가 깊이 고민해 봐야 할 문제이다.
그러나 이런 차별적인 능력을 보유하고도 독일군은 베르됭에서 참혹하게 실패했다. 결정적인 이유는 참모총장 에리히 폰 팔켄하인이었다. 절대 부적격자였던 그가 총장이 된 이유는 오직 빌헬름 2세의 총애 덕분이었다. 베르됭 전투는 단 한 명의 부적절 인사가 모든 걸 망칠 수 있다는 증거다. 지난 수십 년간 좋게 끝난 정권이 없다. 왜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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