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로 또 같이’ 한다는 건[2030세상/김지영]

  • 동아일보
  • 입력 2022년 4월 12일 03시 00분


김지영 스타트업 투자심사역(VC)·작가
김지영 스타트업 투자심사역(VC)·작가
몇 해 전, 이제는 아득한 해외여행이라는 것이 자유롭던 시절, 7년을 내리 일한 끝에 이직 휴가를 얻어 발리로 떠났다. 8일간 혼자 하는 여행이었다. 우연찮게 시기가 겹쳐 남편도 이직 전형이 한창이었던 만큼 미안함도 컸지만 언제 다시 올지 모르는 기회임을 부부이기 이전에 직장인인 두 사람은 너무 잘 알고 있었다. 여행이 중반 즈음 다다랐을 때, 그의 최종 합격 소식을 듣게 됐다. 그렇게 발리의 한 호텔에서 각자의 캐리어를 끌고 재회했다.

나흘을 함께 보낸 뒤 ‘혼자’ 한국으로 돌아왔다. “아니, 같이 있다가 어떻게 혼자만 들어와?” 많은 이들이 싸운 거냐며 우려를 내비쳤지만 나는 되레 의아했다. “기껏 비싼 돈 들여 왔는데 그 사람도 충분히 즐겨야지!” 그가 없던 시간, 나는 홀로 요가를 다니며 즐거웠다. 내가 없을 시간, 그 또한 홀로 서핑을 배우며 즐거울 것이었다. 공항 앞에서의 작별이 아쉽지 않았다면 거짓말이지만, 그의 예정된 행복을 포기시킬 만큼은 아니었다.

어느덧 연애 12년 차, 결혼 7년 차에 접어들었다. 제 입으로 평가하기 무엇하지만 나름대로 건강한 관계를 다져 오고 있다고 자부한다. 물론 시행착오도 있었고, 여전히 서로 맞춰 나갈 지점들이 존재하지만 이 관계가 서로에게 위안이 된다는 것, 어서 빨리 집에 가고 싶은 이유가 된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그리고 그 기저에는 모순적이게도 이렇게 서로에 대한 독립성이 자리하고 있다.

결혼 후, 서로의 크고 작은 일상을 공유하는 것은 벅찼다. 종종 “왜 혼자 왔어?” 결혼식, 집들이, 하물며 본가에 가도 여기저기서 그야말로 ‘반쪽’을 찾듯 상대를 찾았다. 나란히 붙어 있는 책상, 하나의 침실은 가족의 탄생과 더불어 개인의 소멸을 뜻했다. 끼니부터 여가까지, 서로 다른 두 사람이 무언가를 함께하기 위해서는 어느 한쪽이 양보할 수밖에 없는 섭리를 무참하게 깨달았다. 때로는 상처받고 때로는 상처 주며 긴 시간 노력했다. 그리고 이것이 우리가 찾은 균형이다.

서로 다름을 존중하고, 의지하되 의존하지 않는 관계. ‘함께’를 핑계로 상대의 희생을 당연시하지 않는 관계. 말하자면 ‘따로 또 같이’. 대단한 것은 아니다. 내가 요가를 좋아하듯 그가 서핑을 좋아함을 존중하는 것. 매 주말을 기다려 데이트하지만 하루는 되도록 각자 시간을 보내는 것. 나아가 불필요한 ‘반쪽 소환’으로부터 상대를 적극적으로 보호하는 것이다. 두 사람이 바로 서기 위해서는 각자부터가 바로 설 수 있어야 한다고 믿는다. 그래야 어느 한쪽에게 너무 많거나 적은 역할을 주지 않는다.

물론 가족의 형태와 개인의 성향에 따라 그 균형 값은 천차만별일 것이므로 정답은 없다. 어떤 불균형은 누군가에겐 균형일 수 있다. 다만 중요한 것은 지금 우리의 균형이 어디쯤인지를 아는 것이다. 배려의 시소가 버겁게 치우쳐져 있지는 않은지 촉각을 곤두세우고 조율해 나가는 것이다. 쉽게는 나를 위해 좋아하지도 않는 떡볶이를 함께 먹는 그에게 잊지 않고 고맙다 말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 마음들이 쌓여서일까. 이제 그는 나보다도 더 떡볶이를 좋아한다.
#따로 또 같이#떡볶이#개인의 성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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