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는 봄을 다잡다[이준식의 한시 한 수]〈156〉

  • 동아일보
  • 입력 2022년 4월 1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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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월, 다 졌나 했던 꽃이 다시 피고/낮은 처마엔 날마다 제비들 날아든다.

자규가 야밤에도 피 토하며 우는 건/봄바람을 되부를 수 없다는 걸 믿지 못해서라네.

(三月殘花落更開, 小첨日日燕飛來. 子規夜半猶啼血, 不信東風喚不回.)

―‘봄을 보내며(송춘·送春)’ 왕령(王令·1032∼1059)



자연의 봄도 인생의 봄도 ‘청춘’이라는 같은 이름을 쓴다. 청춘은 생기와 생명력과 무한한 가능성에 힘입어 늘 풋풋하고 고귀하다. 가는 봄을 애석해하며 ‘꽃이 피면 같이 웃고 꽃이 지면 같이 울고’(‘봄날은 간다’)라 노래한 심정은 그래서 동서고금이 다르지 않다. 다 졌나 싶던 꽃잎이 기적처럼 다시 개화한 것인지, 아니면 차마 봄을 못 보내는 시인의 간절함 덕택인지 막바지려니 했던 봄꽃이 다시 피어나고, 멀리 떠났던 제비들이 찾아들어 활기를 보탠다. 이에 더하여 자규(子規)조차 봄바람을 되불러올 수 있다고 자신하며 밤들도록 울어댄다. 봄을 잡아두려는 몸짓들이 이토록 분주하기에 시인의 집념도 강고하다. 봄바람을 다시 불러들일 수 있겠다고 확신한다.

자규는 두견새, 접동새, 귀촉도(歸蜀道), 불여귀(不如歸) 등 여러 별칭이 있고 자주 비운의 상징으로 등장하는데, 망국의 한을 품은 촉왕(蜀王) 두우(杜宇)의 화신이라는 전설 때문이다. 김소월의 ‘오 불설워(너무 서러워)/시샘에 몸이 죽은 우리 누나는/죽어서 접동새가 되었습니다’(‘접동새’)와, ‘울어 피를 뱉고 뱉은 피 도로 삼켜/평생을 원한과 슬픔에 지친 작은 새’(김영랑 ‘두견’)도 그런 이미지와 닿아 있다. 한데 시인에게 자규의 울음은 이런 절규와는 딴판이다. 그것은 절망적 비탄이 아니라 사그라질 청춘을 다잡으려는 의지이자 다짐 같은 것이다. 3월, 아직 한창인 봄의 앞길을 지레 상심하지 않겠다는 시인의 송춘(送春) 소회가 생억지는 아닐 테다.

#가는 봄#봄을 보내며#왕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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