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성북구 동선동의 권진규 아틀리에에서 검은색 찻잔을 본 순간 나는 생각이 멈췄다. 그 찻잔은 일본의 다인(茶人) 센노 리큐(千利休·1522∼1591)가 사랑했던 ‘구로라쿠다완(黑樂茶碗)’이었기 때문이다.
자세히 들여다보고 싶어 담당자에게 수차례 부탁을 드렸으나, 대답을 받지는 못했다. 아틀리에의 옛 사진을 돋보기로 봐도 확인할 수 없었고, 권진규의 작업 노트를 살펴봐도 이와 관련된 기록을 찾지 못했다.
이 다완은 어디에서 왔고, 왜 이곳에 있는가? 누가 만들었을까? 설마 그는 아니겠지. 또 그가 이 다완으로 말차를 마셨을까? 커피를 좋아했다고 하는데…. 궁금증은 커져갔다. 다완의 밑면, 굽을 한 번만이라도 자세히 살펴보면 실마리라도 찾을 수 있을 텐데. 여하튼 인연 따라온 것은 틀림이 없을 것이니 잠시 상상해 보기로 한다.
3월 마지막 주말부터 나는 수차례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열린 ‘권진규 탄생 100주년 기념―노실의 천사’를 보러 갔다. 그리고 그의 아틀리에를 찾았던 것이다. 노실(爐室)이란 그의 작품을 구운 가마이자, 그 가마가 있는 아틀리에를 뜻한다. ‘천사’란 그곳에서 태어난 그의 작품들이다. 이번에 전시된 240여 점의 작품은 모두 날개깃을 펼치며 우리 곁에 왔고. 나는 하나하나 작품들을 마주 보며 그에게 다가가려는 중이다. 권진규는 일본 무사시노(武藏野)미술대학에서 공부했고, 질감이 살아 있는 테라코타 작업이 인상적이다. 1967년 ‘자소상’, 1968년 ‘손’ 등의 작품에서 그의 예술에 대한 강한 의지를 느낄 수 있다.
한편 리큐는 올해 탄생 500주년을 맞이한다. 리큐는 아즈치모모야마(安土桃山)시대에 좁은 다실에서 소박한 다도구로 정신성을 중요하게 여기는 와비차(侘茶)를 완성했고 새로운 미의식으로 일본 다도의 길을 열었다. 동시에 그는 임진왜란을 일으킨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1537∼1598)의 다도 선생이며 자문역이기도 했으나, 히데요시로부터 노여움을 사 결국 그의 명령으로 할복해 세상을 마감했다.
구로라쿠다완은 리큐가 차에 걸맞게 디자인하고 조선에서 온 도공 초지로(長次郞)를 지도해 만든 라쿠야키(樂燒) 중 검정 다완으로 조선의 사발 ‘이도다완(井戶茶碗)’에서 영감을 얻어 제작했다. 차의 녹색이 가장 아름답게 보이며 리큐에게는 특별한 다완이다.
히데요시도 처음에는 소박한 와비차를 배우려고 했으나, 권력을 가져 욕망이 커진 그는 더 화려한 다도를 선호하게 됐다. 조립식 황금다실까지 만들어, 임진왜란을 일으키기 위해 일본을 떠나는 마지막 성(城)인 사가(佐賀)현의 나고야(名護屋)성에 황금다실을 가져가 다회를 열었다고 한다. 이런 히데요시는 구로라쿠다완을 싫어했다. 같은 시기에 리큐는 다회를 마련하며 히데요시에게 그가 싫어했던 구로라쿠로 차를 대접했다고 한다. 아마 리큐는 목숨을 걸고 충고하려 했던 것이 아니겠는가. 리큐가 할복 명령을 받은 요인에는 여러 설이 있지만 그중에는 임진왜란을 반대했다는 이야기도 있어 한국과의 인연은 깊다.
필자는 일본문화 강의 시간에 일본 다도를 설명하며 실기수업을 갖는다. 서너 명을 한 팀으로 연구실에서 함께 차를 마신다. 때로는 여러 개 다완 중 학생에게 하나를 고르게 하는데, 그 이야기가 기억에 남았는지 몇 학생은 구로라쿠를 선택한다. 아직은 코로나로 인해 실기 강의를 못 하지만 재개되면 반드시 이도다완과 구로라쿠다완으로 차를 내려줄 것이다.
이 글을 준비하던 나는 어젯밤 오랜만에 (요즘 일본에 가지 못해 구하기 힘들어 아끼다가) 유효기간이 지난 차를 혼자 구로라쿠에 담아 음미했다. 권진규와 리큐는 각각 조각가와 다인, 100년 전과 500년 전 인물이다. 시대도 장르도 다르지만 두 사람은 한국과 일본 양국의 예술에서 자극받으며 예술적 혼을 불태웠다. 권진규가 아틀리에에서, 리큐가 다실에서 지킨 그들의 치열한 삶은 마치 구도자(求道者)와 같았고, 그래서 더욱 우리에게 감동적으로 다가온다.
권진규 전시는 서울에 이어 광주시립미술관에서도 열린다. 더 많은 사람들이 그의 작품세계를 접하면 어떨까? 그의 혼이 어린 작품들이 노실의 천사가 되어 우리 앞에 나래 깃을 펼칠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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