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무공’ 이순신 장군과 ‘심청전’ 심학규의 공통점은?[광화문에서/황규인]

  • 동아일보
  • 입력 2022년 4월 18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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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규인 스포츠부 차장
황규인 스포츠부 차장
“야, 휠체어 타고 왔다고 안 일어나냐?”

장애인 체육 관계자가 모인 회식 자리였다. 건배사를 하겠다며 ‘자리에서 일어나 달라’고 부탁한 참석자가 지체장애인 한 사람에게 이렇게 말했다. 그러자 이 장애인을 시작으로 웃음이 번졌다. “참, 너는 원래 못 일어나지”라는 다음 대사 때는 웃음소리가 더 커졌다. 장애를 비웃은 걸까? 전혀 그렇지 않다. 때로 욕설이 돈독한 친구 사이를 드러내는 징표인 것처럼 이들도 이렇게 우정을 드러냈을 뿐이다.

이 에피소드가 생각난 건 2020 도쿄 올림픽 양궁 3관왕 안산 때문이었다. 안산은 14일 트위터에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후원 사실을 공개하며 “비장애인이 불편함을 감수하는 게 당연한 세상이 오기를”이라고 썼다.

아니다. 장애인 차별을 철폐하는 건 비장애인이 불편함을 감수하는 게 아니라 아무도 불편하지 않은 세상을 만드는 거다. 당장 안산조차 장애인 선수처럼 휠체어에 앉아 상체 힘만으로 활을 조준하는 불편한 경기 방식을 당연하게 받아들이지 못할 것이다. 배려만으로는 장애인 차별을 없앨 수 없다.

역사를 봐도 알 수 있다. 충무공 이순신 장군은 ‘심청전’ 등장인물 심학규처럼 봉사(奉事)를 지냈다. 이제 봉사는 ‘시각장애인을 낮잡아 이르는 말’이 됐지만 원래는 조선시대 종8품 관직 이름이었다. 시각장애인에게 이 자리를 ‘하사하는’ 일이 많아 아예 시각장애인을 뜻하는 표현으로 굳은 거다. 벼슬을 내리는 국가적 배려도 관직명이 비하적인 뉘앙스로 바뀌는 것까지는 막지 못했다.

차별을 줄인 건 기술 발달이었다. 기술이 발달하면 물건값이 내려간다. 장애인복지법은 ‘더 좋은 쪽 눈’ 교정시력이 0.2 이하인 사람을 시각장애인으로 규정한다. 만약 안경이 고급 자동차 한 대 가격이라면 지금보다 훨씬 더 많은 이들이 시각장애인으로 살아야 할 거다. 그러나 라식 같은 시력교정수술까지 발전한 이 시대에 맨눈 시력이 0.2 이하라는 이유로 ‘나는 시각장애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다. 익숙해지면 인식도 바뀐다. 19세기에는 ‘신체적 결함이 드러난다’면서 구매 여력이 있는 부유층조차 안경을 꺼렸지만 이제는 서민도 ‘패션 아이템’으로 안경을 착용하곤 한다.

이런 기술이 나오기 전까지는 어떻게 해야 할까. 비장애인과 장애인을 구분하지 않고 서로 똑같은 마음으로 대하면 된다. 배려는 때로 차별일 때도 적지 않다. 휠체어 사용자에게 ‘너는 왜 안 일어나?’라고 농담을 건네는 건 배려가 부족할지 몰라도 차별적이지는 않다. 차별하지 않으면 이해하게 된다. 비장애인에게 불편함이 없는 모든 일은 장애인에게도 불편함이 없어야 한다.

대한장애인체육회는 ‘장애인의 날’을 하루 앞둔 19일 서울시청, N서울타워 등을 장애 인식 개선 상징색인 보라색으로 물들이는 ‘#WeThe15’ 캠페인을 진행한다. 전 세계 인구 15%가 장애인이라는 의미다. 이 캠페인을 보면서 우리가 떠올려야 하는 낱말은 ‘배려’라는 명사가 아니라 ‘똑같다’는 형용사다.

#이순신#심학규#공통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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