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때때로 신화의 힘을 빌려 삶을 견딜 만한 것으로 만든다. 신화가 존재하는 이유 중 하나다.
아득한 옛날, 어느 산골마을에서 있었던 일이다. 모두가 지독하게 가난했다.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입에 풀칠하기가 힘들었다. 그래서인지 언제부턴가 희한한 풍습이 생겼다. 누구든 일흔 살이 되면 산속에 버리기 시작한 것이다. 그들이 처한 궁핍한 현실에서 노인은 버려도 되는 일종의 잉여물이었다.
그렇다고 저항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어떤 아들은 산속에 가서도 어머니를 두고 갈 수 없다며 울고, 어머니는 그런 아들의 뺨을 때리며 순리를 따르라고 다그친다. 서로에게 못할 짓이다. 아들은 밖으로 울고 어머니는 안으로 운다. 결국 아들은 어머니를 두고 돌아선다. 프로이트가 말한 현실원칙이 이긴 것이다. 집에 돌아오니 그의 아내가 어머니의 옷을 입고 있다. 누군가는 그렇게 버려지고 나머지 사람들은 삶을 이어간다. 그 사람의 옷을 입고 그 사람 몫을 먹으며.
이마무라 쇼헤이 감독의 영화로 잘 알려진, 후카자와 시치로의 소설 ‘나라야마 부시코’에 나오는 이야기다. 허황된 이야기 같지만 법이 미치지 않는 가난한 마을에서는 실제로 그런 일이 있었을지 모른다. 한국의 설화에도 그런 이야기는 있다. 흉년이라도 들어 생존이 위협받는 실존적 상황에서는 더욱 그랬을지 모른다. 문제는 심리적 충격이요 상처다. 그것을 방치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노인이 나라야마산에 가면 산신령을 만나 천국에 간다는 신화가 만들어졌는지 모른다. 그런 환상이라도 있어야 버려지는 부모도, 부모를 버리는 자식들도 생이별에 따르는 상처와 후유증을 삭일 수 있었을 테니까.
“문명의 기록치고 야만의 기록이 아닌 것이 없다”는 발터 베냐민의 말대로 야만적인 시대였다. 그렇다면 지금은 덜 야만적일까. 가난한 노인은 더 이상 잉여적 존재가 아닐까. 노인들이 버려지던 슬픔의 산은 형태만 다르지 어딘가에 여전히 존재하는 것은 아닐까. 신화마저도 잃어버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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