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일(현지 시간) 이집트 수도 카이로의 한 대형마트를 찾았다. 서민들의 주식인 ‘발라디’ 빵 5개들이 한 묶음이 1이집트파운드(약 67원)에 팔리고 있었다. 발라디 값은 러시아가 2월 24일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직후 한때 2.5이집트파운드(약 167원)까지 올랐다. 최근 정부가 10억 달러(약 1조2500억 원)의 보조금을 푼 덕에 겨우 원래 수준으로 내려왔다. 직원은 “값이 올랐을 때 많은 고객이 빵을 집어 들었다 내려놓곤 했다”고 전했다.》
밀 수입의 80%를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에 의존하는 이집트는 러시아의 침공 후 가격이 급등해 상당한 고민을 안고 있다. 농산물 가격 상승이 전반적인 물가 상승으로 확산되는 ‘애그플레이션’(농업+인플레이션) 현상도 뚜렷하다. 3월 소비자물가는 12.1% 상승했고 4월에는 더 오를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이런 현상은 이웃 레바논, 튀니지 등은 물론이고 파키스탄, 스리랑카 등 중동과 서남아시아 전역에서 목격할 수 있다. 국제통화기금(IMF), 세계은행 등에 다급히 손을 벌리고 있지만 낙후된 경제구조, 극심한 빈부격차 등 기존의 고질적 문제가 여전해 경제난이 쉽게 해소되지 않고 있다. 최근 미국의 금리 인상 가속화로 미 달러에 대한 현지 통화 가치 또한 계속 떨어져 수입 물가 상승에 따른 인플레이션 압력을 높이고 있다.
경제난이 정정 불안이나 정권 교체로 이어지는 현상도 뚜렷하다. 인도네시아에 이은 세계 2위 이슬람 국가 파키스탄(인구 2억3000만 명)은 경제난 여파로 10일 1947년 건국 이후 최초로 의회가 현직 총리를 축출했다. 스리랑카에서도 연일 고타바야 라자팍사 대통령의 퇴진을 요구하는 반정부 시위가 벌어지고 있다. 2011년 ‘아랍의 봄’ 시위 당시 주 무대였던 카이로 타흐리르 광장에서는 시위대가 “빵, 자유, 정의”를 외쳤다. 이런 움직임이 다시 나타날 수 있다는 관측이 제기된다.
밀·비료 주도 애그플레이션
유엔 식량농업기구(FAO)에 따르면 3월 세계 식량가격지수는 전월 대비 12.6% 오른 159.3을 기록했다. 1996년 집계를 시작한 후 최고치다. 데이비드 비즐리 세계식량계획(WFP) 사무총장은 “현 수준의 식량 위기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로 본 적이 없다”고 했다.
현재 식량가격 상승을 주도하고 있는 작물은 밀이다. 지난해 t당 600∼800달러였던 세계 밀 가격은 러시아의 침공 직후인 3월 초 1250달러까지 치솟았다. 현재도 1100달러대에 머물고 있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는 각각 세계 1위, 5위의 밀 수출국이다. 두 나라에서 자국 내 필요한 밀 소비량의 30% 이상을 수입하는 국가는 전 세계적으로 50개국이 넘는다. 알자지라에 따르면 레바논은 밀과 식용유 수입의 90% 이상을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에 의존하고 있다. 최근 레바논 국민들은 빵은 물론이고 소, 양 등 고기류도 구하기 어려워하고 있다. 시민 라힐라 이브라힘 씨는 AFP통신에 “사실상 채식주의자가 됐다. 선택의 여지가 없다”고 토로했다.
현재 레바논의 밀 비축량은 불과 4주, 이집트 또한 5개월 정도로 알려져 있다. 러시아는 세계 각국이 자국에 경제 제재를 가했다는 이유로 밀 수출을 일시 중단했다. 국토 곳곳이 침략당한 우크라이나 또한 밀 수출을 할 수 없는 상황이다. 올해는 아예 파종조차 못해 우크라이나의 밀 생산량 급감이 불가피하다. 전쟁이 끝나더라도 당분간 밀 가격 상승이 이어질 수밖에 없다.
비료 문제도 있다. 시장조사회사 스태티스타에 따르면 2020년 기준 러시아는 세계 1위 비료 수출국이며 6위는 러시아의 침공 조력자 노릇을 하고 있는 벨라루스다. 강도 높은 제재로 현재 두 나라는 비료를 거의 수출하지 못하고 있다. 애그플레이션 위협이 고조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막시 토레로 FAO 수석 경제학자는 로이터통신에 “비료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내년 식량난이 올해보다 더 심각해질 것”이라고 우려했다.
달러 상승도 식량난 부채질
미 달러에 대한 통화 가치 하락 또한 저개발국의 고민이다. 러시아의 침공 후 세계 투자자들의 안전자산 선호 현상이 강화돼 기축 통화인 달러의 인기가 높아졌다. 이 와중에 미 중앙은행인 연방준비제도(Fed·연준)가 공격적으로 금리를 인상하면서 신흥국의 자금 이탈이 가속화하고 있다. 연준은 기준 금리를 결정하는 다음 달 연방공개시장위원회(FOMC)에서 기존의 0.25%포인트 인상이 아닌 0.50%포인트 인상, 즉 ‘빅 스텝(big step)’을 단행할 뜻을 거듭 밝혔다.
그 결과, 스리랑카 루피의 가치는 최근 두 달간 70% 이상 급락했다. 레바논파운드 가치 역시 최근 2년간 90% 하락했다. 그렇지 않아도 값이 오른 밀과 비료를 사려면 과거보다 더 많은 돈을 줘야 하는 셈이다. 국제 농산물시장에서의 결제 또한 대부분 달러로 이뤄지기 때문이다.
스리랑카는 지난달 9일 와인 등 생필품이 아닌 367개 제품의 수입을 금지했다. 비생필품의 수입이 인플레와 통화가치 하락을 부추긴다는 이유에서다. 이집트도 차 전문 브랜드 ‘립톤’을 포함해 200개 서구 브랜드 등에 대한 수입을 중단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제 사정은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파키스탄은 25일 “IMF로부터 20억 달러를 지원받고, 기존에 빌린 30억 달러에 대한 상환을 1년 미루기로 했다”고 발표했다. 앞서 스리랑카 또한 12일 일시적 채무불이행(디폴트)을 선언하고 IMF에 추가 구제 금융을 요청하기로 했다. 레바논도 7일 IMF로부터 30억 달러를 받기로 했다. 이집트와 튀니지 또한 IMF에 구제금융을 요청하고 답을 기다리고 있다.
‘제2의 아랍의 봄’ 우려
각국 정부는 이번 식량난과 인플레이션이 대규모 반정부 시위의 도화선이 될까 우려하고 있다. 이미 11년 전 ‘아랍의 봄’으로 중동 각국에서 정권 교체가 일어난 탓에 이번 시위가 제2의 아랍의 봄이 되지 않을까 두려워하는 분위기가 더 강하다.
스리랑카의 라자팍사 대통령은 19일 자신의 권한을 상당 부분 총리에게 넘기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수도 콜롬보 등 곳곳에서 아예 퇴진하라는 요구가 끊이지 않는다. 10일 의회에서의 불신임안 통과로 축출된 임란 칸 전 파키스탄 총리의 해임안 표결 때는 그가 속한 파키스탄정의운동당(PTI) 소속 일부 의원까지 찬성표를 던졌다. 크리스탈리나 게오르기에바 IMF 총재는 최근 “가난한 사람들이 가족을 먹여 살릴 수 없을 때 거리로 나올 것”이라고 경고했다. 아무리 권위주의 통치가 횡행하는 저개발국가라 해도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지도자에 대한 민심은 싸늘할 수밖에 없음을 잘 보여준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