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을 만나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외젠 뷔르낭의 그림 ‘성묘로 달려가는 사도 베드로와 요한’을 나는 조금 특별한 방법으로 만났다. 1850년 스위스에서 출생했고, 사실주의적 화풍의 성화를 많이 그렸다는 것 외에 뷔르낭에 대해 알려진 것은 별로 없다. 그가 1898년에 그린 이 그림도 많은 사람의 관심을 끈 작품은 아니다.
이 그림을 나는 서경식의 책 ‘나의 서양 미술 순례’에서 처음 만났다. 이 책은 1983년에 유럽을 여행하면서 그가 만난 미술 작품에 대한 이야기를 담은 미술기행서이지만, 한국의 정치 현실과 그것에 의해 희생된 가족들 그리고 자신에 관한 이야기를 담은 책이기도 하다. 인간의 고난을 형상화한 그림들 앞에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해 가던 그는 뷔르낭의 그림을 우연히 만났다. 긴 여정, 허둥지둥 쫓기듯 달려온 지난날들, 새벽 여명에 깃든 내일을 향한 간절함. 마침내 이 그림에서 그는 자신의 모습을 보았다. 에필로그에 수록된 이 그림과 함께 서경식의 순례길은 끝을 맺는다. 잘 알려지지 않았던 평범한 이 그림은, 이 책을 읽은 나와 수많은 독자들, 특히 저자와 동시대 아픔을 겪었던 사람들에게, 이제는 ‘아는 그림’이 되었다. 그림은 이렇게도 만나진다.
뜻하지 않게 이 그림을 다시 만난 건, 김연수의 장편 소설 ‘원더보이’에서였다. 이야기는 1984년에서 시작한다. 불의의 사고로 부모를 잃은 어린 정훈은, 정치적 선동을 위해 급조된 ‘원더보이’가 되어 혼란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되고, 별명에 걸맞은 초능력을 갖게 된다. 민주화 운동, 시위, 그리고 분신이 벌어지던 1980년대 후반, 상실감과 두려움 가운데서 초능력인 독심술에 의지해 표류하는 삶을 살아간다. 그리고 그런 방황의 끝에서 정훈은 이 그림을 만난다. 순간, 내 앞에 정훈의 모습과 청년 서경식의 모습이 겹쳐졌다. 김연수는 이 그림을 어떻게 알게 되었을까? 나처럼 서경식의 책을 읽었을까? 나의 지나친 억측일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그림을 보면 두 인물이 화면의 중앙보다 왼쪽으로 치우쳐져 있고, 인물의 뒤쪽에 더 많은 공백이 있다. 마치 그들이 달려온 긴 여정에 많은 사연이 있었음을 암시하듯 말이다. 그 사연은 서경식의 사연이고, 원더보이 정훈이의 사연이고, 또 쫓기듯 살아온 우리 모두의 사연이기도 하다.
우연이 하나 더 있다. 2년 전부터 다니기 시작한 교회에 이 그림의 복제품이 있다. 예배당 2층에 걸려 있는 이 그림을 처음 발견했을 때 소스라치게 놀랐다. 도대체 이 그림은 또 어떤 사연으로 여기에 걸려 있는 것일까? 두 권의 문학 작품으로 먼저 만난 이 그림은 이제 내 삶의 한 부분이 되었다. 나는 이 그림을 매주 본다. 고개를 돌려 그림을 바라볼 때마다, 이 그림 앞에 서서 자신의 모습을 마주했던 사람들의 간절함을 느낀다. 그리고 나의 간절함은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 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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