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역사는 반복과 개선을 거듭하며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고 변증법적 발전을 통해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 고전주의가 지나면 낭만주의가 오고, 질서와 균형을 중요시하던 르네상스 이후에 바로크가 뒤따랐다. 같은 맥락에서 20세기 초에 시작된 합리적이고 논리적인 ‘모더니즘 건축’ 끝에 낭만적이고 화려한 경향의 건축이 널리 퍼졌다.
특히 20세기 후반에 등장한 자유로운 형태의 건축은 보편적인 가치와 합리적인 구조의 건축으로 채워졌던 도시의 풍경에 활기와 해방감을 준다. 마치 “이런 것은 어때?”라고 묻는 것 같다.
사실 인간의 생각은 처음부터 질서정연하기보다는 뒤엉켜 있으며 자유로운 상상에서 출발한다. 그런 뒤 그것을 펼쳐놓고 순서를 맞추고 문맥을 따져가며 정리한다. 그래야 모든 사람과 소통할 수 있고 이해를 구할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건축이란 머릿속에 있는 생각만으로 지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을 실행하는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어야 하고 공간을 사용하는 사람들이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 건축가들은 그런 제약 속에서 한편으로는 늘 자유로워지고 싶어 한다.
공사를 시작한 지 100년이 훌쩍 지났지만 여전히 미완성인 스페인 바르셀로나의 사그라다 파밀리아 대성당(성가족성당)은 완공되기도 전에 이미 하나의 역사로 자리매김했다. 한 세기가 넘도록 건축되는 과정을 전 세계가 지켜보고 있는 건축은 전무후무할 것이다.
종교 건축은 기본적으로 상징의 궁전이다. 사그라다 파밀리아는 상징으로 가득하다. 지옥과 천당이 공존하고, 마치 하늘에서부터 내려온 성스러운 음악이 성당 안으로 가득 쏟아져 들어오는 것만 같다. 그런 의미로 그곳에 들어가는 것은 단순한 건축물이 아니라 차원을 달리하는 어떤 세계로 들어가는 것과 같다.
그 건축물을 설계한 건축가는 안토니오 가우디다. 그의 건축은 바르셀로나를 상징하며, 바르셀로나의 자부심과도 같다. 파도치는 것과도 같은 유려하고 현란한 곡선으로 가득한 그의 건축은 독보적인 조형성을 갖고 있어서 그 어떤 잣대로도 평가하기 어렵다
가우디는 세상은 곡선으로 이뤄졌다고 말했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우리를 둘러싼 모든 자연에는 직선이 없다. 엄밀히 이야기하자면 완벽한 직선이란 없을 것이다. 완벽한 직선이란 것은 하나의 관념일 뿐이고, 사실 모든 것은 원만하고 부드러운 곡선으로 이뤄져 있다.
어차피 건축이란 자연의 모방이다. 인간은 자연의 말을 인간의 말로 변환해 이해하고 실행한다. 그런 과정에서 건축물은 규준을 적용하며 직선의 형태로 변환된다. 그러다 보니 곡면이나 원형으로 이뤄진 공간은 어떤 상징이나 권위를 위해 지어지는 특수한 용도의 건물인 경우가 많다. 자연을 닮은 가우디의 건축은 예외랄 수 있겠지만 사실 사람들은 곡선으로 이뤄진 공간에 대해서는 무척 불편해하고 낯설어한다.
자유로운 곡선이나 조형을 적용한 건축을 표현주의적 건축이라 부르기도 한다. 역사적으로 가끔 그런 독특한 조형 감각을 가진 건축가들이 나타나곤 하는데, 20세기 후반에 많이 등장한다.
그런 성향을 가진 건축가를 꼽자면 얼마 전 세상을 떠난 자하 하디드와, 미국 건축가 프랭크 게리가 대표적이다. 게리는 1929년에 태어났으니 90세가 넘은 고령이고, 페이스북 사옥을 설계하는 등 지금도 왕성하게 활동을 하고 있다. 캐나다에서 태어난 폴란드계 유대인으로, 16세 되던 해에 미국 서부 캘리포니아로 이주했다. 평생 따뜻하고 자유로운 공기를 가진 캘리포니아에 살면서 활동하고 있다.
미국에서도 캘리포니아 일대를 근거지로 하는 건축가들의 스타일은 자유롭고 개방적인데, 에릭 오언 모스, 톰 메인 등과 같이 게리도 그런 성향의 건축가 중 하나이다. 그의 디자인은 그중에서도 극단적인 형태로 확장돼 가장 전위적이고 가장 실험적이다. 그러면서 그는 가장 대중적인 건축가로 자리 잡는다. 그의 독특한 건축은 현대의 자본주의에 적절하게 틈입했고 스페인에 반짝이는 티타늄을 자유롭게 널어놓은 듯한 외관의 빌바오 구겐하임 미술관을 설계하며 세계적인 성공을 거둔다.
몇 년 전 서울 강남구 청담동 언덕길을 걸어가다가 새로 짓는 하얀 건물을 보게 되었다. 무척 현란한 형태의 외관이었는데 나는 ‘누군가 프랭크 게리를 흉내 내고 있네’라고 생각하며 지나쳤다. 그런데 그건 정말 게리의 작업이었다. 리모델링을 통해 비정형 유리 덩어리들이 겹쳐진 형태를 만들었는데, 한국의 춤사위와 수원 화성 등을 상징하는 것이라고 들었다. 사실 그건 잘 모르겠고 ‘게리표 건축’의 전형이었다.
물고기처럼 반짝거리고 면이 고르지 못한 거울에 비친 형상처럼 비틀리고 꼬인 그의 건물은 유클리드 기하학의 세계에서는 존재하기 힘든 또 다른 세계관이다. 그는 일반적인 기법으로 완성하기 어려운 아이디어를 구현하기 위해 선박 디자인 프로그램으로 설계한다.
모더니즘의 끝에서 절연된 과거를 다시 잇자며 풍부한 장식의 포스트모더니즘이 성행하고 해체주의 건축이 대두되던 끝단에 그의 건축이 있다. 그런데 문제는 역사에 대한 성찰이나 건축에 대한 진지한 고민보다는 자본주의 시장에 최적화된 건축이라는 데 있다. 불이 일 듯 개발이 일어나고 눈에 띄는 상업적인 건축이 득세하는 세상에서 게리의 표현 과잉, 자의식 과잉의 건축은 몸에 맞춘 옷처럼 잘 어울리며 한 시대를 유연하게 이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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