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의 여름. 남미 대륙의 깊은 산속을 지나던 여행사의 승합차가 반정부 게릴라에게 납치된다. 관광객과 가이드까지 총 6명, 모두 일본인이다. 반정부군은 인질극을 벌이며 정부와 협상을 하지만 100일이 넘도록 진전이 없자 인질도, 인질범도 한계에 달한다. 죽음에 대한 불안이 가중되던 중, 인질들은 우연한 계기로 자기들만의 낭독회를 갖는다. 남기고 싶은 이야기를 써서 읽기로 한 건데, 이들은 유서를 쓰는 대신 약속이나 한 듯이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인상적인 사건들을 고른다. 제3자가 보면 무척 사소하고 볼품없는, 사건이라고도 하기 어려운 순간의 기억이지만 인질들은 서로의 심정에 공감하며 울고, 웃는다. 남미에서 일하는 남편을 만나러 온 주부, 사업차 출장 온 사장, 이민 간 조카의 결혼식을 보러 온 고모 등등 인질들은 모두 평범했고, 이들이 가장 아끼는 기억은 화려하지도 요란하지도 않았다.
인생은 순간의 연속이다. 인질들이 낭독의 소재로 택한 기억은 자신을 더 나은 미래로 이끌어준 고마운 순간들이었다. 그 당시엔 아픔과 절망의 시간이었을지라도. 한 사람의 인생이 시련과 고통으로만 점철될 리는 없다. 분명 보석 같은 순간들이 존재한다. 보물찾기 놀이처럼 어딘가에 분명히 보물이 숨어 있다는 걸 믿기만 해도 우리의 일상은 자주 반짝일지 모른다.
인질들은 죽음을 예견하면서도 지금의 자신을 만들어준 일등공신인 그 사소한 순간에 감사한다. 또한 그 순간을 만들어준, 보이지 않는 수많은 인물에게도 감사하며 자신의 인생이 축복이었음을 깨닫는다. 어떤 내일을 맞이할지라도 오늘을 원망으로 흘려보내서는 안 된다는 걸, 지금이 내 인생에서 가장 소중히 다뤄야 할 때란 걸 잘 알고 죽음이 다가오는 마지막 순간까지 정성을 다한다. 실화는 아니다. ‘박사가 사랑한 수식’으로 유명한 오가와 요코의 동명소설이 원작이다.
뜬금없지만 일본의 공립 도서관이 생각난다. 동네마다 도서관이 있는 데다 외국인 여행자도 제약 없이 드나들 수 있어서 편하다. 처음 갔을 땐, 칠십이 넘은 노인들이 전문서적을 읽으며 필기까지 하는 모습이 흔한 풍경이라 놀랐다. 신선한 충격이었다. 새로운 도서관을 찾느라 길을 헤매다 어느 낡은 건물의 경비원에게 길을 물은 적이 있다. 여든이 다 된 할아버지는 손바닥만 한 경비실에서 빽빽이 영어를 쓴 공책을 자랑하며 자신도 휴일엔 그 도서관에서 영어 공부를 한다면서 나를 동지처럼 반겼다. 인질들의 낭독을 들으니, 남은 생애의 날수를 계산하는 대신 오늘을 충실히 가꾸는 이들이 떠오른다. 오늘에 대한 예의는 어제까지의 삶에 감사하는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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