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일(현지 시간) 미국 수도 워싱턴 인근 메릴랜드주 플래그폰즈 공원을 찾았다. 체서피크만에 면한 이 공원에서 불과 수백 m 거리에 ‘캘버트클리프 원자력발전소’가 있다. 1975년 발전을 시작한 이 발전소는 메릴랜드에 있는 유일한 원전이다. 2000년 설계 수명을 연장했고 2005년 조지 W 부시 당시 대통령이 현직 대통령으로는 20년 만에 처음으로 방문한 원전으로 유명해졌다.》
딸과 함께 해변에 나온 주민 베키 씨(38)에게 ‘원전의 안전을 걱정하지 않느냐’고 물었다. 그는 “전혀 걱정하지 않는다”며 “좋은 일자리와 값싼 전력을 제공하는 원전은 지역 사회에 없어서는 안 될 존재”라고 답했다.
지난해 집권한 조 바이든 미 대통령은 주요 국정 의제로 청정에너지를 내세웠다. 이에 따라 미 지방정부 또한 속속 원전에 대한 규제 완화에 나서고 있다. 화석연료 의존도를 낮추기 위해 노후 원전 폐쇄를 늦추고, 신규 원전을 건설하려는 움직임이 한창이다. 특히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국제 유가가 급등하면서 에너지 자립을 위해서라도 원전을 강화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원전 활성화 앞장 美 주지사
2020년 기준 미국에는 28개 주에 56개 발전소와 94기의 원전이 있다. 이 원전에서 생산되는 전력이 미 전체 소비전력의 20%를 차지한다.
한때 원전은 미 사회의 금기어였다. 1979년 펜실베이니아주 스리마일섬 원전에서 원자로 온도 급상승으로 핵연료 노심이 녹아내렸다. 다행히 인명 피해는 없었지만 10만 명의 주민이 대피했고 방사성 물질이 일부 누출됐다. 사고 직후 현장을 찾은 지미 카터 당시 대통령은 “신규 원전을 짓지 않겠다”고 선언했고 이후 오랫동안 원전이 지어지지 않았다.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은 2010년 신규 원전 허가를 재개했다. 늘어나는 에너지 수요를 감당하면서 온난화를 막기 위해서는 온실가스를 배출하지 않는 원전 건설이 불가피하다고 본 것이다. 2011년 동일본 대지진 당시 후쿠시마 원전 사고로 미국 내에서도 원전 반대 목소리가 높았지만 오바마 전 대통령은 허가를 계속했고 현재에 이르고 있다.
최근에도 미 주요 주지사들은 당적에 관계없이 원전 활성화에 앞장서고 있다. ‘한국 사위’로 유명한 래리 호건 메릴랜드 주지사(공화당)는 2045년까지 ‘주내 탄소 배출 제로(0)’를 선언한 기후변화 대책법을 마련했다. 최근 주의회를 통과한 이 법안은 원전을 친환경 에너지로 규정하고 있다. 캘버트클리프 원전에서 생산되는 전력이 주 내 탄소중립 에너지의 80%를 차지하는 만큼 원전 없이 탄소 저감이 불가능하다는 이유에서다.
지난달 28일 개빈 뉴섬 캘리포니아 주지사(민주당) 또한 당초 2025년 운영을 중단할 예정이었던 ‘디아블로캐니언’ 원전의 운영 기한 연장을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그는 “이 사안을 논의하지 않는다면 그것이야말로 주지사의 업무 태만”이라고 강조했다.
4000만 명의 주민을 보유한 캘리포니아는 미 50개 주 중 가장 인구가 많아 전력난이 일상화했다. 그런데도 주 내 원전은 디아블로캐니언 단 한 곳밖에 없어 오래전부터 원전 추가 건설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나왔다. 당초 뉴섬 주지사는 환경단체의 요구에 따라 2016년 원전 폐쇄에 동의했지만 거듭된 전력난으로 원전의 중요성이 커지자 6년 만에 스스로 정책을 바꿨다.
북부 미시간주에서도 이달 말 폐쇄 예정인 ‘팰리세이드 원전’의 운영 연장을 위해 그레천 휘트머 주지사(민주당)가 직접 나섰다. 1971년부터 가동된 이 원전은 2031년까지 운전 허가를 받았지만 원전 운영 업체의 경영난, 환경단체 등의 반발 등으로 조기 폐쇄가 결정된 상태다. 그는 지난달 20일 미 에너지부에 “원전 폐쇄를 막기 위해 노후 원전의 재가동을 지원할 예산을 우선 배정해 달라”는 서한을 보냈다. J B 프리츠커 일리노이 주지사(민주당) 역시 주내 원전 2기를 폐쇄하려던 계획을 최근 폐기했다.
원전 건설 규제도 줄줄이 폐지
몇몇 주는 원전 신규 건설을 위한 규제 완화에 나섰다. 웨스트버지니아주는 올해 2월 1996년 제정된 원전 건설 금지법을 26년 만에 완화했다. 원자력 폐기물 처리 시설이 확보되기 전까지 원전 건설을 금지한다는 기존 법안을 폐기해 신규 원전의 빠른 건설이 가능하도록 길을 열어줬다.
웨스트버지니아는 주 내 전력의 88%를 석탄 화력발전에 의존하고 있다. 2019년 미 인구통계국 기준 중위소득이 미 50개 주 중 49위일 정도로 가난한 주에서 환경 문제까지 심각해지자 원전 의존도를 높이기로 한 것이다.
지난달 인디애나 주의회 역시 주정부에 원전 설치를 허용하는 권한을 부여하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이달 초 일리노이 주의회도 원전 규제 해제를 위한 논의에 착수했다. 조지아주는 이미 신규 원전 건설 계획을 확정하고 내년부터 공사에 돌입하기로 했다. 북극권의 알래스카주 역시 환경단체의 거센 반대에도 원자로 신규 건설을 위한 타당성 검토 작업에 돌입했다.
연방정부 차원의 지원도 잇따른다. 바이든 행정부는 지난달 19일 “노후 원전의 재가동을 지원하기 위해 60억 달러(약 7조4300억 원)의 예산을 투입하겠다”고 밝혔다. 제니퍼 그랜홈 미 에너지장관 역시 “원자력은 청정에너지”라며 “좋은 일자리를 창출할 뿐 아니라 지구를 구하기 위해 필수적”이라고 강조했다.
바이든 행정부는 지난해 의회를 통과한 1조 달러의 인프라 투자 법안에 ‘소형모듈원자로(SMR)’ 등 차세대 원자로 개발을 지원하기 위한 25억 달러의 예산을 포함시켰다. SMR는 발전 용량이 300MW(메가와트) 이하지만 가동 효율은 기존 원전의 4배가량 높다. 증기 발생기 등 모든 설비가 원자로 안에 들어 있어 안전성도 뛰어나다.
민간 차원의 SMR 개발도 활발하다. 빌 게이츠 마이크로소프트(MS) 창업자가 투자한 것으로 유명한 원전 회사 ‘테라파워’는 2028년 와이오밍주에서 SMR 운전을 시작하겠다는 계획을 밝혔다.
한국 원전 수출 확대 기회
미국의 원전 르네상스가 원자력 강국으로 평가받는 한국에 큰 기회가 될 수 있다는 관측이 나온다. 중국과 러시아 또한 강국이지만 미중 갈등과 우크라이나 사태 등으로 미국이 동맹국에 중국, 러시아의 원자력 기술을 도입하지 말라는 뜻을 강조하고 있어 한국 원전 기술의 해외 수출이 용이해졌다는 의미다. 21일 서울에서 개최될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과 바이든 대통령의 첫 한미 정상회담에서도 한미 원자력 협력이 의제로 다뤄질 것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워싱턴의 한 외교 소식통은 “한국의 3세대 신형 원전(APR-1400)은 해외 원전으로는 유일하게 미 정부의 승인을 받았다”며 “미국과의 원전 협력이 원전 수출의 확대로 이어질 수 있다”고 기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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