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제20대 대통령이 어제 취임식을 갖고 용산 집무실에서 5년 임기의 공식 업무를 시작했다. 군 통수권도 인수받았다. 무한 책임의 시험대에 오른 셈이다. 윤 대통령은 취임사에서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 체제를 기반으로 국민이 진정한 주인인 나라로 재건하겠다”고 했다. 전체를 관통한 키워드는 ‘자유’였다. 우리 정치가 제 기능을 못 하고 있다면서 그 원인으로 ‘반(反)지성주의’를 지목한 뒤, 국내외 난제 해결을 위해 자유라는 보편적 가치를 공유해야 한다고 했다.
윤 대통령은 아울러 ‘빠른 성장’을 강조했다. 그래야 많은 국민이 새로운 기회를 찾을 수 있고, 사회 이동성을 제고해 양극화와 갈등의 근원을 제거할 수 있다는 논리였다. 또 우리 국민과 재외동포를 넘어 ‘자유를 사랑하는 세계 시민 여러분’을 수차례 외치며 청자(聽者)로 삼았다. 역대 취임사 중 처음이다. 세계 시민의 자유와 인권, 이를 위한 국제사회와의 연대를 강조했다.
역대 대통령들은 취임사에서 그 나름의 시대정신을 제시하고 국정의 주요 방향을 밝혔다. 취임사의 초심(初心)이 제대로 지켜지지 않고 변질돼 실패한 대통령으로 기록된 경우가 다반사였지만, 국민은 취임사를 통해 경제와 복지, 외교안보 등에 대한 새 정부의 큰 노선을 파악할 수 있었다. 윤 대통령의 취임사는 원론적인 수준에 머무른 듯한 느낌이다. 자유와 인권, 공정, 연대 등 중요한 가치를 내세웠지만 구체적인 액션 플랜은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국 정치가 갈수록 퇴보하는 것도, 사회가 극도로 양극화된 것도 따지고 보면 국민 다수가 동의하는 보편적 가치의 부재, 철학의 부재 탓일 수 있다. 그 점에서 자유 인권 등의 가치를 강조한 건 의미가 있다. 이를 어떻게 추구할 것인지가 관건이다. 윤 대통령이 ‘다수의 힘’ 등 우회적으로 거대 야당을 겨냥하면서도 통합이나 협치를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은 것은 의아한 대목이다. 정치는 타협의 예술이다. 여소야대다. 싫든 좋든 손을 내밀고 협조를 요청해야 한다.
윤 대통령이 ‘보편적 국제규범’에 대한 지지와 연대를 강조한 것은 미중 전략 경쟁과 러시아의 전쟁 도발로 뚜렷해진 신냉전 대결 구도에서 자유진영의 한 축으로 분명히 서겠다는 의지로 읽힌다. 다만 반(反)중국·러시아 연대 참여가 부를 역풍이나 급속한 쏠림이 낳을 부작용도 충분히 감안하고 있는지는 의문이다. 대북 정책에 대해선 “전쟁을 회피하는 취약한 평화가 아니라 지속가능한 평화를 추구하겠다”고 했다. ‘담대한 계획’의 로드맵이 나와야 한다.
윤석열 정부에 대한 평가도 궁극적으론 경제 성적표로 판가름이 날 공산이 크다. 재정을 통한 일자리 창출이나 포퓰리즘은 지양하고 초격차 기술 등 국가 핵심 산업 육성 프로젝트도 시급하다. 취임사만 놓고 보면 윤곽이 분명치 않은 추상화로 보인다. 정교하고 섬세한 붓질이 필요하다. 국정은 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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