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쇼팽 발라드 4곡과 소나타 3번 등을 담은 음반을 내고 같은 프로그램으로 전국 순회 연주 중인 피아니스트 조재혁은 50대에 연주자로서 절정기를 맞이한 ‘역주행’ 소감을 이렇게 말했다. “연주자의 커리어는 계획대로 풀리지도, 각자 인생의 비슷한 시기에 오지도 않죠.”
문화계에서 ‘역주행’이란 중앙선을 침범하는 것이 아니라 뒤늦게 인기를 얻는 ‘차트 역주행’을 뜻한다. 연주가뿐 아니라 작곡가나 명곡도 종종 역주행을 경험한다.
바흐나 헨델보다 일곱 살 위였던 이탈리아 작곡가 안토니오 비발디는 1741년 사망한 뒤 오랫동안 이탈리아 음악학자들 일부가 학문적으로 연구하는 대상이었지 널리 연주되는 작곡가는 아니었다. 1955년 이탈리아 악단 ‘이 무지치’가 비발디의 바이올린 협주곡집 ‘사계’를 음반으로 내놓은 뒤 이 작품은 문자 그대로 클래식 차트 1위를 정복하기 시작했다.
말러는 1897∼1907년 당시 세계 음악계 정상의 지위였던 빈 궁정오페라 감독을 지냈지만 그가 작곡한 교향곡들은 이해하기 힘든 괴짜 작품 취급을 받기 일쑤였다. 1960년 그의 탄생 100주년과 이듬해 서거 50주년이 이어지면서 그의 교향곡들은 그의 교향곡 2번 제목처럼 ‘부활’하기 시작했다. 말러와 마찬가지로 유대인이었던 미국 지휘자 레너드 번스타인이 그의 교향곡 전곡을 음반으로 내놓았고, ‘나의 시대가 올 것이다’라는 말러 생전의 예언은 실현됐다.
라흐마니노프 교향곡 2번의 사정은 예전 이 코너에서 전한 바 있다. 이 곡은 길고 복잡하다는 이유로 1960년대까지 잘 공연되지 않았다. 지휘자 앙드레 프레빈은 1971년 자신이 수석지휘자로 재직하던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를 이끌고 소련과 아시아 순회연주에 나섰다. 순회 동안 이 곡을 한층 깊이 이해하게 된 그는 2년 뒤 이 곡의 명연으로 꼽히는 음반을 발매했고, 이 곡의 인기는 계속 높아져 고금의 다른 유명 교향곡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인기곡이 되었다.
오스트리아 작곡가 안톤 브루크너는 ‘늦깎이’로 교향곡 세계에 진입했지만 그의 교향곡들에 대한 청중과 비평가들의 반응은 차가웠다. 그가 간신히 인정을 받은 것은 60세에 당대의 명지휘자 아르투어 니키슈의 지휘로 발표한 교향곡 7번에서였다. 미완성으로 남은 9번을 포함해 그에게는 교향곡 두 곡과 12년이라는 시간이 남아 있었다.
베르디 오페라 ‘시몬 보카네그라’는 ‘리메이크 역주행’의 대표 사례다. 본디 이 작품은 베르디가 43세 때 발표했지만 참담한 흥행 실패를 겪었다. 무려 24년이 지나 아리고 보이토의 도움으로 이 오페라는 대대적인 개정에 들어갔다. 보이토는 그 자신이 작곡가였고 대본 작가였으며 한때는 베르디 작품의 비판자이기도 했지만 이 숨은 명작의 부활을 위해 힘을 보탠 것이다. 1881년 밀라노 라 스칼라 극장에서의 개정판 공연은 대성공을 거두었고, 이 작품은 베르디의 대표작 중 하나로 자리매김했다.
위의 사례들은 최소한 이 작품이 세상에 나온 것을 작곡가들이 본 경우이지만, 아예 작곡가가 세상을 떠난 뒤에 발견되어 명곡의 대열에 오른 작품들도 있다. 31세라는 아까운 나이에 세상을 등진 슈베르트의 인기 교향곡 두 곡도 그렇다.
슈베르트의 교향곡 C장조 ‘더 그레이트’는 그가 세상을 떠나고 10년 뒤인 1838년 세상 밖으로 나왔다. 잠자고 있던 이 곡의 악보를 발견한 주인공은 로베르트 슈만이었다. 그러고 나서 26년 뒤, 슈베르트 타계로부터는 무려 37년이나 지난 1865년, 지휘자 요한 폰 헤르베크가 두 악장만으로 된 슈베르트의 교향곡 악보가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오늘날 ‘미완성 교향곡’으로 불리는 작품이다. 이 곡은 헤르베크의 지휘로 작곡 43년 만에 초연됐다. 비제가 17세 때인 1855년에 쓴 교향곡 C장조도 1933년에야 발견됐다.
어떤 예술작품이든 재평가의 기회를 기다린다. 어떤 무명 예술가든지 자신의 작품이 정당하게 인정받을 날을 기다리며 작업한다. 말러가 생전 ‘나의 시대가 올 것이다’라고 한 말이 작곡가들의 금언처럼 회자되는 것도 그 때문이다. 그러나 이 말이 세상과의 불통에 대한 작곡가의 변명이나 방패로 이용되어서는 곤란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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