뜨거운 온천도 있지만 차가운 냉천도 있다. 조선시대에는 몸 안에 화(火)가 쌓여 심해진 안질(眼疾·눈병)을 치료하기 위해 냉천을 찾았다. 물의 냉기로 화를 진정시키려는 시도였다. 추사 김정희 선생은 “도저히 붓대를 잡고 글씨를 쓸 수가 없다”고 할 정도로 안질이 심했다. 추사는 자신의 안질 치료 경험을 모아 ‘안질조치대법(眼疾調治大法)’이란 책까지 썼다. 핵심은 “화가 없으면 눈병도 안 생긴다(眼無火不病)”는 것. 한방은 사람의 눈을 불, 즉 화의 통로라고 본다. 당연히 눈병은 화병과 관련이 많을 수밖에 없다.
조선의 왕들은 화증(火症)을 많이 앓았다. 무인이었던 이성계의 혈통을 이어받아 다혈질이었기 때문이다. 칼이 아닌 글과 언어로 정치를 하려다 보니 애간장이 탔다. 특히 세종대왕은 평생 안질로 고생했다. 온갖 불행이 그의 화증을 심화시켰다. 아버지 태종은 세종의 외삼촌 4형제를 몰살했고 장인마저 사형시켰으며 어머니의 몸종을 후궁으로 삼아 세종이 어머니와 외가의 간섭으로부터 벗어나게 했다.
세종의 타고난 성실함도 안질을 심화시켰다. 재위 23년 4월 세종은 두 눈이 흐릿하고 깔깔하며 아픈 증상을 호소했다. 의관들은 “임금이 모든 일에 부지런하고 글과 전적을 손에 놓지 않고 즐겨 봐 안질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고 진단했다.
세종이 앓은 안질의 공통점은 안구 통증과 건조감이다. 통증은 화증이다. 건조감은 눈물이 마르거나(안구건조증) 결막염을 앓았을 때 나타나는 증상인데 세종이 앓았던 소갈병(당뇨) 후유증으로 생기는 신생혈관증과는 구분된다. 재위 23년 “안질을 얻은 지 10여 년이 되었다”는 기록으로 추산하면, 세종이 안질을 얻은 시기는 35세 전후이고 42세에 더욱 심해져 시력이 매우 나빠진 것으로 볼 수 있다. 재위 24년 안질로 인해 세자에게 정사를 위임하고자 결심한 것을 보면 통증과 시력 저하가 아주 심했던 것으로 보인다.
안질이 악화되자 세종은 ‘초수(椒水)’를 찾아 치료를 시도했다. 초수는 맛이 떫은 찬물을 말한다. ‘동의보감’에 따르면 물밑에 있는 백반은 성질이 찬데 화가 속으로 몰리면서 오한이 나거나 편두통이 있을 때 사용한다. ‘호초(胡椒)처럼 매운맛이 난다’고 하는데 지금으로 말하면 톡 쏘는 탄산수의 맛이다.
세종대왕은 초수를 찾는데도 과학자다운 면모를 보였다. 여러 차례 환자를 보내 치료해보고 임상 경험을 확인한 후 치료에 나선 것. 재위 26년에는 청주의 초수리를 지목해 행궁을 세우고 두 달간에 걸쳐 치료했고, 그 후에는 전의현(현 세종시)에서 치료했다. 치료의 결과는 좋았다. 재위 31년의 기록에는 “세종의 안질이 이미 나았다”고 쓰여 있다. 하지만 치료 결과가 초수 때문인지는 알 수 없다.
안질을 치료하는 약식 처방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세종은 전복을 복용했다. 실록에도 “아들 문종이 전복을 직접 썰어드리자 세종이 감동해 눈물을 흘렸다”는 기록이 있다. 전복이 열기를 식혀 기운을 내는 자음약식의 대표이고 보면, 세종의 안질은 화증임에 틀림없다. 성군의 길은 고단하고 힘든 길임을 안질이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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