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은 중국이 아니라 미국에 기울 수밖에 없다고 했다. 다만 시간이 좀 걸린다고 했다.”
지난해 초 조 바이든 미 행정부 출범 직후 문재인 정부는 미중관계에 대한 입장이 담긴 문서를 미국에 보냈다. 여기에 이런 내용이 포함됐다. 문재인 정부 고위 당국자를 지낸 인사가 전한 얘기다. 그는 “미국에 시간을 달라고 했고 미국도 동의했다”고 했다.
실제 국민들이 피부로 느낀 미중 갈등 속 문재인 정부의 외교는 모호했다. 정부 당국자들은 “전략적 모호성”이라는 말 뒤에 숨었다. 지난해 정의용 당시 외교부 장관은 중국의 공세적 외교를 “당연한 일”이라고 했다. 중국을 “신기술 관련 분야에서 점점 가까워지는 파트너”라고 표현했다.
중국에 정통한 외교관은 정 전 장관을 두고 “중국을 몰라도 너무 몰랐다. 중국이 북핵 문제에서 정말 도와줄 것이라고 믿었다. 그만큼 순진했다”고 혀를 찼다. 문재인 정부의 고위 외교관은 주중 한국대사에 대해 “장하성 대사도 했는데 누가 간들 못하겠느냐”고 했다. 그만큼 장 대사가 역할이 없었다고 꼬집은 것이다.
문재인 정부가 중국에 저자세 외교를 한다는 비판을 받는 동안 중국 전문가와 매체들은 문재인 정부의 외교를 ‘미중 사이 균형외교’라고 높이 샀다. 그러다 임기를 1년 남긴 지난해 5월 한미 정상회담에서 문재인 정부는 미국 쪽으로 방향타를 급히 틀었다.
중국은 한미 공동성명에 대만 문제가 포함되자 “불장난하지 말라”고 경고했다. 왕이 중국 외교부장이 지난해 9월 한국에 와 문재인 대통령을 만났다. “각자의 핵심 이익과 중대한 우려(關切)를 존중해야 한다.” 문 대통령 면전에서 ‘미국의 중국 견제에 동참하지 말라’고 요구한 것이다.
중국의 전문가들, 기자들과 대화를 하다 보면 “왜 자주적 외교를 하지 않고 미국에만 의존하느냐”는 불만이 노골적으로 드러난다. 미국이 한국의 반중 정서를 막후에서 조종하고 있다는 인식까지 드러낸다.
성균중국연구소가 한중 수교 30주년을 맞아 3월 ‘2022 한중 전문가 상호인식 조사’를 발표했다. 지난해 말 한국·중국 전문가 각각 100명을 심층 조사했다. 한국 전문가들은 한중 관계 저해 요인으로 ‘역사문화 인식차’와 ‘민족주의 갈등’을 꼽았다. 반면 중국 전문가들은 ‘국제정치 등 외부요인’이라고 했다. 미국이 문제라는 것이다.
한미동맹 강화를 천명한 윤석열 정부 출범 직후 중국은 ‘요구 외교’를 재개했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의 오른팔인 왕치산 국가부주석이 시 주석 특사로 취임식에 참석했다. 윤 대통령과 따로 만나 공개된 자리에서 “한중관계 발전 관련 5가지 건의”라며 요구를 나열했다. “민감한 문제를 타당히 처리하라”고 요구한 왕치산은 “한중 산업 공급망은 떼려야 뗄 수 없다”고 강조했다. 이어 왕이 부장은 박진 외교부 장관과의 화상 회담에서, 중국 외교부 표현에 따르면 “4가지 한중관계 강화 방안을 제기했다”. 왕 부장은 공급망 차단에 반대한다고 경고장을 날렸다.
두 사람 다 공급망을 강조한 것이 눈에 띈다. 윤석열 대통령의 외교 지향을 확인한 중국은 ‘중국 시장을 포기할 것이냐’고 압박해 올 것이다. 마찰을 피하겠다는 저자세로는 안 풀린다. 중국에 정통한 외교관은 “중국은 주변에 우군이 없다. 그래서 한국이 필요하다”고 했다. “첨단기술 협력만큼은 한국의 살길은 중국이 아니라 미국”이라며 분명한 레드라인을 제시해야 한다. 그래야 존중받는다. 대통령실 관계자는 중국에 당당한 외교를 하겠다고 했다. 말뿐 아닌지 지켜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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