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미 정상회담에서 중국과 관련된 내용과 표현 수위는 몇 년 전부터 최대 조율 과제였다. 공동성명에 ‘중국’이 명시된 적은 없지만 대만해협, 인권, 5G 기술 등 중국이 민감해하는 내용을 놓고 한미 양측은 매번 적잖은 물밑 신경전을 치렀다. “이러면 우리는 중국한테 죽는다”는 읍소부터 낯을 붉혀가며 내놓는 항의까지 한국 외교관들이 구사한 ‘밀당’ 방식은 다양했다.
공동성명에 대만해협 언급이 처음 들어간 건 지난해 5월 워싱턴에서 열린 한미 정상회담에서였다. ‘문재인 정부=친중(親中)’으로 인식하고 있던 워싱턴의 싱크탱크 인사들은 문 정부가 이에 합의했다는 점에 놀라움을 표시했다. ‘싱가포르 선언’과 ‘판문점 선언’의 계승을 공동성명에 담는 대가로 미국의 대중(對中) 압박 동참 요구를 덥석 받아준 게 아니냐는 분석이 나왔다. 당시 청와대와 주미대사관 인사들은 부인한다. 초안에서 미국이 요구한 내용은 훨씬 많았는데, 그나마 그 수준으로 낮췄다는 것이다.
윤석열 대통령과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의 첫 정상회담 공동성명에는 중국 견제의 성격을 띤 내용들이 확 늘어났다. 윤 대통령이 ‘인도태평양 경제프레임워크(IPEF)’ 화상 정상회의에 참석하는 등 공동성명에서 확인한 일부 내용은 벌써부터 실제 이행 단계로 진입했다. 경제안보 협력과 기술동맹을 통해 한미 관계를 업그레이드하겠다는 새 정부의 정책 방향에 모호함은 없어 보인다. 출범 후 11일 만에 이런 결단을 내놓기까지 주저한 흔적도 없다.
“한국은 미중 사이에서 선택할 수 있는 국가”라는 주미대사의 발언이 거센 논란을 불러일으켰던 게 불과 2년 전이다. 동맹인 미국을 상대하는 현장에서조차 중국의 눈치를 봤던 게 한국 외교의 실상이었다. 이제 윤 정부의 대외 지향점이 분명해진 만큼 앞으로 최소 5년간은 이런 논쟁이 재연될 가능성은 사라졌다. ‘안미경미(安美經美)’ 식의 지나친 편중은 경계해야 하겠지만, 반도체와 전기차 배터리 같은 핵심 산업 분야에서 한미가 밀착하는 만큼 ‘안미경중(安美經中)’ 노선은 존립 근거부터 약해진 게 사실이다.
중국의 보복 가능성에 대한 한국의 걱정을 미국도 모르는 게 아니다. 미 당국자들은 사석에서 “걱정 마, 우리가 지켜줄게”라며 큰소리를 치기도 한다. 구체적인 방어책이나 지원 방안이 있는지는 모르겠다. 그 대신 미국은 한국이 동맹 관계를 더 단단히 할수록 대중국 파워가 커질 것이라고 강조한다.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이 윤 대통령의 당선 직후 먼저 전화를 걸어온 것, 취임식에 2인자인 왕치산 국가부주석을 보낸 것을 근거로 든다. 지난해 한미 공동성명에 대만해협이 언급됐을 때 중국의 반발이 우려만큼 거칠지 않았다는 점 또한 미국이 주목하는 부분이다. 당시 한미 양국은 중국의 반응 강도가 10점 척도로 따졌을 때 3, 4점 정도에 그쳤다는 평가를 공유했다.
‘미국이냐 중국이냐’ 식의 이분법적 질문은 당초 접근법부터 틀렸던 측면이 없지 않다. 현재의 외교 진영 싸움은 특정 국가라기보다 자유, 인권, 공정 같은 가치를 앞세우는 방향으로 전개되고 있다. IPEF만 해도 ‘조세와 반(反)부패’ 같은 4가지 분야별로 조건을 충족시킨다면 어느 국가라도 들어올 수 있도록 설계돼 있다. 그렇다면 이제 선택은 한국이 아닌 중국의 몫이다. 글로벌 규범과 시장경제의 룰을 지키며 국제사회의 흐름에 동참할지 여부에 대한 선택 말이다. 한국에 으름장을 놓으며 또 다른 보복에 나설 것인지, 동반성장의 공통분모를 찾아 협력할 것인지에 대해서도 중국이 답을 내놔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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