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10월 8일. 박한기 당시 합동참모본부 의장은 국회 국방위원회 국정감사에서 북한 함경북도 길주군 풍계리 핵실험장 상황을 두고 이렇게 말했다. “복구에 수주에서 수개월이 소요될 것”이라고도 했다. 당시는 북한의 풍계리 핵실험장 ‘폭파 쇼’ 여운이 채 가시지도 않았던 시점. 군에선 이례적이란 반응이 나왔다. 군 서열 1위인 합참의장이 여전히 북한 비핵화 의지에 기대를 걸고 있던 문재인 정부의 기조와 결이 다른, 핵실험장 복구 가능성 발언을 공개적으로 했기 때문이다.
북한이 2018년 5월 외신 기자들을 초청해 풍계리 핵실험장을 폭파한 지 4년이 흘렀다. 북한은 이제 김정은 국무위원장 결단만 있으면 언제든 핵실험 버튼을 누를 수 있는 상황이 됐다. 3월 풍계리 핵실험장 3번 갱도 복구에 나서더니 2개월 만에 핵실험 준비를 마쳤다. 박 의장 발언이 현실화된 것이다.
북한의 핵·미사일 수위는 우리는 물론이고 미국 역시 간과할 수 없는 수준이 됐다. 수년간 단거리탄도미사일(SRBM) 등을 꾸준히 발사한 북한은 이제 ‘핵 투발 수단’에 대한 기술력을 자신하는 단계에 도달했다는 게 전문가들의 평가다.
한미 당국은 북한이 심혈을 기울인 투발 수단에 탑재할 소형화된 핵무기(전술핵) 개발을 임박한 7차 핵실험 목적으로 보고 있다. 문재인 정부 때 비핵화 협상을 진행하는 중에도 북한은 자신들의 스케줄대로 야금야금 국방력 증강 목표를 달성한 것으로 보인다.
북한의 핵·미사일은 꾸준히 고도화됐지만 우리 군은 그간 한반도 안보 상황이나 북한 핵·미사일 능력에 대해 있는 그대로 알리기보단 소극적일 때가 많았다. 심지어 북한 능력을 평가 절하하는 모습까지 보였다. 북한이 새로운 극초음속미사일이나 SRBM, 순항미사일 등을 공개했을 때 군은 “남쪽으로 날아올 경우 요격이 가능하다”며 큰 위협이 아니라는 반응을 내놓기도 했다.
그나마 군이 꾸준히라도 이런 반응을 내놨다면 차라리 보수적인 군의 특성 때문이라고 이해하고 넘어갔을 터. 문제는 군의 태도가 오락가락했다는 것이다. 정권 성향에 따라 북한 도발에 대한 평가나 반응 등에서 온도차가 확연했다는 얘기다.
남북 관계를 최우선 순위에 뒀던 문재인 정부에선 군이 그 기조에 발맞추느라 북한의 도발을 도발이라 표현조차 못 할 때가 많았다. 북한 군사력을 과장해 이를 정치적으로 활용하는 것도 경계해야 하지만 남북이 여전히 대치하는 한반도에서 적어도 국민 안위를 책임지는 군만큼은 정치적 고려를 배제해야 한다는 게 대다수 군 관계자들의 공통된 인식이다. 이는 군에 대한 신뢰와 직결된 문제이기도 하다. 군 관계자는 “국민의 안전에 위협이 될 수 있는 상황을 있는 그대로 알리고, 확고한 대비태세를 갖추고 있다고 설명하는 게 군의 역할”이라고 했다.
윤석열 정부 출범 11일 만에 열린 21일 한미 정상회담의 화두는 북한 핵·미사일 위협에 대한 한미 공조 강화였다. 당분간 한반도에선 북한의 크고 작은 도발이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 새 정부는 커지는 북한 위협 속에서 한반도 내 군사적 긴장감을 안정적으로 관리해야 하는 도전적인 과제를 안게 됐다.
정권이 교체됐지만 군은 있는 그대로 ‘팩트’만 국민들에게 전달하면 된다. 문재인 정부 때처럼 북한 상황이나 핵·미사일 능력을 평가 절하할 필요도, 대북 정책에 보다 강경한 새 정부의 기조에 맞춰 북한 위협을 과장할 필요도 없다. 정치적 판단에 대한 유혹에서 자유로워야 군은 신뢰를 얻을 수 있다.
박 의장의 ‘그때 그 발언’이 사실은 소신 발언이 아닌 해프닝이었을 수도 있다. 군령권의 책임자인 그가 작심하고 발언했을 가능성이 크지만 국회의원들의 집중 공세에 당황한 나머지 실수로 소신 발언이 툭 나왔을 수도 있다는 얘기다. 이유야 어쨌든 군 관계자들은 박 의장의 발언을 두고 ‘해야 할 말을 했다’고 평가한다. 수년 전 발언을, 그것도 실수로 한 말일 수 있는데도 회자되는 이유를 지금 군은 곱씹어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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