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라산은 예약하고 가야 하는데, 하셨어요?” 주말에 한라산에 갈 거라고 하자 회사 후배가 물었다. 제주도행 항공편은 예약했지만 한라산 예약은 처음 들어 봤다. 검색해 보니 후배의 말이 맞았다. 한라산 입산을 하려 해도 사전 예약이 필요했다. 인기 있는 날짜는 몇 주 전에 예약이 차는 경우가 많고, 입장권이 고가에 거래되어 문제가 되기도 했단다. 가려고 했던 날 한라산은 이미 매진이었다. 한라산 예약이 되는 날로 여행 일정을 바꿨다.
제주도에 도착해도 예약의 연속이었다. 어지간한 식당들은 이미 예약이 꽉 차 있었다. 근처 덜 유명한 식당에서도 20분쯤 기다려야 했다. 심지어 돌아오는 공항에서도 한정판 과자를 사기 위한 긴 줄을 보았다. 오늘날의 제주도는 생각 없이 훌쩍 떠나올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예약을 하지 않아 곤란을 겪다 보니 떠날 때의 충동적인 마음이 전부 사그라들었다.
제주도에서 겪은 일들이 소비생활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다. 몇 년 사이에 사전 예약과 웨이팅은 일상의 일부가 되었다. 특정 한정판 제품의 구매 권한을 주는 ‘드로우’ 추첨 응모도 익숙해졌다. 인기 전시 예약에도 경쟁이 치열하다. 유명한 초밥집의 예약 경쟁을 일컫는 ‘스강신청’이란 신조어까지 생겼다. ‘스시(초밥)+수강신청’이다. 언제부터 우리는 기다리는 것에 익숙해진 걸까.
기술 발전도 사전 예약 문화 정착에 한몫했다. 포털 사이트 예약 시스템으로 실시간 현황을 확인하고 쉽게 예약할 수 있다. 원격 줄서기 애플리케이션도 인기 식당에서 많이 쓴다. 코로나19 경험도 예약사회(?) 정착에 큰 영향을 주었다. QR 출입 인증과 백신 예약 때문이다. 전 국민이 모바일 디바이스를 통한 예약과 대기 방법을 집중 학습한 셈이다.
기술은 트렌드라는 쳇바퀴를 굴리는 원동력이 될 때가 있다. 핫플레이스나 신제품을 검색하고 예약하는 건 자기 자신을 알고리즘 안으로 던지는 것과 같다. 일단 검색을 시작하면 소셜미디어나 검색 엔진이 새로운 소비 정보를 가장 자극적인 형태로 끝없이 보여준다. 젊은이들도 사실 지쳐 있다. 30대 중반 P는 온갖 신상 카페와 팝업스토어를 찾아다니다 보면 “시간과 돈이 많이 들고 줄 서는 것도 지친다”고 했지만 “도시를 떠나지 않는 한 멈출 수 없다”고 했다. 도시인은 계속 새로운 정보에 노출되고, 자기도 모르게 반응하기 때문이다.
요즘은 혼자 있을 때만이라도 예약이 필요 없는 곳에 가고 싶다. 너무 길게 기다리지 않고 그냥 내가 원할 때 들어갈 수 있는 곳에 가고 싶다. 그래서 커피를 마실 때는 일부러 동네의 유행 지난 카페를 찾는다. 적당히 조용하고 커피 맛도 훌륭하고 커피를 시키면 쿠키를 무료로 주는데도 한적하다. 알고리즘에 걸려 있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같은 이유로 젊은 사람이 없는 오래된 밥집도 자주 간다. 하지만 약속을 잡을 때는 여전히 ‘××동 맛집’을 검색한다. 인기 있는 장소에 가는 것이 만남의 필수 요소이자 목적이 되어 버렸다. 당장 내일 저녁에 갈 식당도 이미 일주일 전 예약해 둔 곳이다. 그만큼 맛이 있을지는 솔직히 잘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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