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현안에 의견이 일치한 것 같아도 묘하게 하나가 어긋나 분위기가 어색해질 때가 있다. 23일 도쿄에서 열린 미일 정상회담이 그랬다.
이날 정상회담 직후 열린 공동 기자회견에서 기시다 후미오(岸田文雄) 일본 총리는 미국 주도 경제협력체 인도태평양 경제프레임워크(IPEF)를 환영한다면서도 “미국이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 현 CPTPP)에 돌아오길 기대한다”는 말을 잊지 않았다. 일본은 미국이 지난해부터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 IPEF를 구상하면서 긴밀히 논의한 주요 파트너 국가다. 그런데도 일본은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IPEF 출범을 밝힌 공동 기자회견에서 마지막 희망을 놓지 않았다. 정상회담 후 일본 언론은 “일본이 미국의 TPP 복귀를 끈질기게 설득할 책임이 있다”며 언젠가는 미국이 TPP로 돌아와야 한다고 촉구했다.
백악관 안팎 분위기는 달랐다. 미 각료들은 미일 정상회담 전후로 TPP에 대해 ‘흘러간 구닥다리’라고 입을 모았다. “우리는 IPEF가 구태의연한 무역협정이 되지 않도록 의도적으로 다르게 설계했다”(지나 러몬도 미국 상무장관) “TPP는 매우 취약했고 미국은 이행할 수 없었다”(캐서린 타이 미국무역대표부 대표) 등 난색 일색의 평가였다. 알파벳 2만1500자 분량의 방대한 미일 공동성명에 ‘TPP’라는 세 글자는 들어가지 않았다.
TPP 참가국이 아닌 한국으로서는 다행이다. 개방률(관세 철폐율) 96%의 역내 자유무역협정(FTA) 블록에 미국이 참여하는데 한국이 들어가지 못하게 됐다면 높은 무역 장벽을 맞닥뜨리게 되는 위기에 직면했을 것이다.
미국이 TPP를 구태의연한 협정이라며 외면하는 것은 단순히 시계를 되돌리지 않으려는 고집이 아니다. 오히려 TPP 한계를 명확하게 인식하고 있다고 봐야 한다. 글로벌 공급망 재편에 사활을 건 미국에 관세 폐지, 비관세장벽 철폐 등은 더 이상 최상의 가치가 아니다. 최근 미국이 중시하는 중국 견제, 반도체 공급망 재편, 부패 방지 등을 위한 조항은 TPP에 없다. 게다가 미국에는 FTA가 ‘미국 시장을 내주고 일자리를 파괴하는 것’이라는 인식이 여전하다. 미국이 TPP에 복귀할 유인이 없다는 뜻이다.
IPEF에는 미국이 글로벌 무역질서에서 지향할 목표가 명확히 담겨 있다. 미국 한국을 비롯한 IPEF 참가 13개국은 공동성명에서 “경제 회복력과 지속가능성 포용성 공정성 등을 목표로 한다”며 “공급망 내 투명성, 다양성, 안보, 지속가능성 향상에 전념한다”고 밝혔다. 가격 경쟁력을 앞세운 경제 영토 확장의 시대가 저물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가치를 공유하지 않는 국가 간 자유무역은 글로벌 공급망 위기를 초래할 수 있다는 위기의식도 담겼다.
글로벌 공급망 재편의 새 규범이 될 IPEF의 출범은 한국에 기회다. IPEF를 주도한 미국 일각에서조차 실효성에 의문을 제기하는 ‘백지 상태’여서 더욱 그렇다. 우물 안 개구리 같았던 한국은 그동안 글로벌 규범 형성에 참여할 힘도, 의지도 약했다. 이제는 다르다. 냉전 붕괴 이후 가장 큰 세계 외교와 경제 질서 변화에 직면한 지금이야말로 지구적 관점에서 규범 형성에 적극 참여할 때다. 한미 양국 정상이 서명한 반도체 웨이퍼는 글로벌 공급망 재편의 중추 국가로 거듭난 한국의 위상을 상징한다. 국제질서 변화를 정확히 읽고 새로 만들어지는 규범에 우리 목소리를 반영하는 것은 향후 수십 년간 국익을 지키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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