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은 일반적으로 ‘남의 감정, 의견, 주장 따위를 자기도 그렇다고 느낌 또는 그렇게 느끼는 기분’이라고 정의합니다. 미국 정신분석가 하인츠 코후트가 창시한 자기심리학은 공감을 기반으로 들으면서 피분석자가 입은 마음의 상처를 찾아내고 공감적 해석을 제공해서 치유합니다. 자기심리학은 공감을 일반적인 정의를 벗어난 넓고 깊게 확장된 전문적인 개념으로 봅니다. 공감은 개인 정신분석은 물론이고 집단 정신치료에도 적극 활용됩니다.
공감적 치료의 결과가 반드시 좋지는 않습니다. 정신분석가가 미숙하다면 분석을 받는 개인이나 집단에 대해 생기는 자신의 감정 반응, 특히 부정적인 것들을 제대로 다루지 못하게 됩니다. 분석 과정에 장애가 일어나고 분석은 실패합니다. 분석가의 공감 능력이 한결같이 제대로 작용해야 치료가 성공합니다.
공감은 세상이 인터넷과 사회관계망 등 다양한 통신 방법으로 언제 어디서나 연결된 21세기에 개인 간, 집단 간 관계에서 상상 이상의 역할을 합니다. 국제관계에서도 군사력과 같은 힘의 역할이 줄어들고 문화와 같은 ‘소프트 파워’의 힘이 늘어나면서 공감은 누구나 관심을 기울여야 할 소중한 가치가 되었습니다.
우리 사회에서도 공감이라는 마음의 기능은 모습을 숨기고 있다가 가끔 수면 위로 떠오르며 존재의 무게를 과시합니다. 공감의 전략적 유용성을 일찍이 발견한 정치권은 자신들의 세력을 확장하려고 공감이라는 양념을 뿌린 말들을 부지런히 여기저기 만들어 냅니다. 공감을 불러일으키면 지지층을 새로 확보하거나 확장하는 데 크게 도움이 됨을 잘 알기 때문입니다. 일단 결성된 지지층은 연예인의 팬클럽 회원들처럼 견고하고 체계적으로 움직입니다. 그들이 연대하고 결속하고 행동하기에 인터넷, 사회관계망, 뉴미디어의 시대인 현재는 더할 수 없이 유리합니다.
갈등 해소에서 공감 능력은 필수적입니다. 상대의 입장에 공감할 능력이나 의사가 없다면 두 사람 사이에, 두 집단 사이에 갈등이 해소될 여지는 사라집니다. 보수는 공감 능력이 떨어지고, 진보는 반대일 것으로 판단하시나요? 정반대일까요? 따르는 이념의 차이에 따라 집단 간에 차이가 있을까요? 아니면 비슷할까요?
정치인이 표현하는 공감은 두 종류입니다. 첫째, 표와 지원을 얻으려는 수단으로서의 공감으로 낮은 수준입니다. 흔히 말을 교묘하게 꾸며서 하는 수사학적 전략으로 모습을 보이나, 현혹되지 않으려면 말을 끝내고 고개를 돌리는 순간 표정에 집중해 살피면 됩니다. 얼굴에 본심이 묻어나옵니다. 둘째, 유권자들에게서 하나라도 더 배우려는 낮은 자세에서 나온 공감입니다. 드물고 낯설지만 수준이 매우 높습니다. 일시적인 감성적 반응이 아닌, 문제를 듣고 해결하려는 노력에 공감이 연결돼 증폭된다면 바로 그것입니다.
누구나 가끔 공감 기능을 차단합니다. 마음의 ‘안전거리’를 지키려는 방어책입니다. 상대가 겪은 부당함과 고통에 내 마음을 너무 깊게 넣었다가 겪을 마음고생을 피하려는 겁니다. 그러나 정치인이라면 달라야 합니다. 정치권에서 떠도는, 말로만 용서를 구하는 피상적인 공감 표현, 예를 들면 자신들의 집단에서 자신의 동료가 손수 저지른 성폭력에 대한 ‘용서 빌기’는 너무나 상투적이어서 약효가 떨어진 지 오래입니다. 피해자가 겪는 고통의 본질을 살펴 이해하지 못하면서 그냥 그래야 할 것 같아서 내뱉은, 면하여 피하려는 발언에는 공감 0%입니다. 오히려 무릎 꿇는 행동이 조금이나마 진정성이 있을 겁니다.
자신의 정치적 미래를 지키려고 집단과 집단 사이의 상호작용에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공세에 치중한다면 스스로 공감 능력이 부족하다고 증명하는 행위입니다. 그런 사람이 상대의 공감 능력을 논한다면 아주 흥미롭고 역설적인, 구경거리가 될 겁니다. 상대에 대한 공감을 기반으로 삼아서 본인이 속한 집단을 깊게 이해하고 고쳐 나갈 의지가 구성원들에게 없다면 그 집단과 지지층의 미래는 밝지 않습니다. 공감 능력에 기반을 두지 않으면 경쟁 집단과의 관계 개선은 불가능하고 지지층 확장도 어렵습니다.
집단 간에 공감적 소통이 오가려면 바늘구멍만 한 틈도 없이 꽉 막힌 철제 울타리를 여기저기 바람구멍이 숭숭 뚫려 통하는 싸리나무 울타리로 바꿔야 합니다. 긴장과 싸움을 상징하는 철제 울타리는 비바람 속에서 튼튼한 듯하지만 갈등 해소와 관계 개선은 뒷전으로 미루고 녹슬어 갑니다.
듣다못해 나 자신에게 중얼거리게 됩니다. “다 보인다, 다 보여!” 자기 이야기를, 마치 상대의 이야기처럼 꾸며서 공격하고 있구나, 참 재주도 좋다, 이런 생각을 합니다. 애초부터 상대가 하는 말을 살펴 듣고 공감하며 이해하려는 의향은 털끝만큼도 없었던 겁니다. 의학적으로, 너무 소리 지르시면 혈압도 올라가지만 성대 결절이 생길 수 있습니다.
끝으로, 정치인들이 힘들었던 과거를 얘기하며 공감 세력을 확장하려는 의도 또한 이제는 낡아서 새롭지 못합니다. 국민은 자신들이 겪고 고통받은 이야기를 정치인들이 들어주기를 소망합니다. 공감하며 살기에 좋은 세상을 만들어 달라고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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