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체, 빙신이제. 깨철이는 빙신이라.” 그녀들은 마치 서로 다짐하듯 그렇게 끝을 맺었는데 그 어조에는 어딘가 공범자끼리의 은근함이 있었다. (중략) 깨철이가 힘들여 일하지 않고도 하루 세 끼 밥과 누울 잠자리를 얻을 수 있는 것 또한 절반 이상이 그런 아낙네들에 힘입은 것이리라. ―이문열 ‘익명의 섬’ 중
이 책과 만난 것은 20여 년 전 논산훈련소 후반기 교육 때였다. 휴대전화는커녕 TV도 금지돼, 유일한 여가는 옛날 소설책 몇 권이 전부였다. 그중 ‘익명의 섬’은 갱지 재질의 표지와 ‘읍니다’ 맞춤법까지 구식이었지만 이내 나를 사로잡았다. 지능은 떨어져도 마성의 매력을 지닌 시골 청년과 그를 성적으로 탐하는 마을 사람들의 은밀한 심리에 매료됐다. 혈기왕성한 훈련병 동기들 사이에서도 이 책은 인기였고, “나도 깨철이가 되고 싶다”가 우리의 입버릇이었다.
최근 내 마음속 판타지, 깨철이를 프로그램에 녹일 기회가 생겼다. 근래에 SNL 호스트로 배우 이상엽 씨가 나왔는데 그가 시골 청년으로 분해 의도치 않은 마성으로 동네 아낙들과 서울에서 내려온 청년 신동엽의 사랑을 독차지한다는 콩트였다. 80분에 육박하는 전체 SNL 공연을 사고 없이 책임져야 한다는 압박 속에서도 이 콩트를 연출하는 동안 내 입가에 미소가 끊이지 않는 걸 발견했다.
개인적인 판타지와 직장의 업무는 일견 물과 기름처럼 보인다. 그것이 당장 성과로 이어진다는 보장도 없다. 하지만 그 둘이 섞였을 때 ‘일하는 재미’라는 화학작용을 일으킨다. 영업사원이 허영만 화백의 만화 ‘세일즈맨’의 판타지를 업무에 적용하든, 변호사가 게임 ‘역전재판’의 판타지를 법정에서 분출하든, 이러한 ‘판타지 녹이기’라는 행위가 직장인들에게 좀더 권해지는 분위기가 되길 희망한다. 그래야 전쟁 같은 업무 중에 슬며시 웃음이라도 지을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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