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의 노여움을 사 죽어야 하는 사람이 있다. 그가 죽음을 피할 유일한 길은 누군가가 그를 대신하여 죽는 것이다. 에우리피데스의 비극 ‘알케스티스’에서 어떤 사람이 처한 실존적 상황이다. 누구도 그를 위해 죽으려 하지 않는다. 그러자 그의 아내가 대신 죽는다.
그는 아내(알케스티스)가 죽자 자신을 위로하려고 찾아온 아버지에게 막말을 한다. 살 만큼 살았으면 아들을 위해 죽어줄 것이지 며느리를 죽게 만들었냐고 원망한 것이다. 낳아서 길러주고 재산과 지위까지 물려줬는데 이제는 죽어주지 않았다고 타박하다니. 아버지는 어이가 없다. 그런데 이것은 아들만의 생각이 아니다. 죽은 며느리도 죽기 전에 남편의 부모를 탓했다. 그녀는 시부모를 두고, “죽는 것이 좋은 나이가 되었으니 아들을 구하고 명예롭게 죽는 것이 좋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시부모를 원망하며 죽은 것이다. 모두에게 노인은 필요에 따라 죽어도 되고 버려도 되는 잉여적인 존재다.
부모에 대한 효를 중시하는 유교 문화권에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이야기다. 우리에게는 부모를 위해 희생하는 효자 이야기는 많아도 부모에게 자기 대신 죽어달라고 하는 자식 이야기는 거의 없다. 문화가 그러한 이야기를 용납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에우리피데스의 비극은 우리와 아무 상관이 없는 것일까. 그랬으면 좋겠지만 노인을 잉여적인 존재로 생각하는 것은 그들만의 문제가 아닐지 모른다. 우리에게도 노인을 잉여, 즉 버려도 되는 존재로 생각하는 마음이 조금은 있을지 모른다. “너는 햇빛을 바라보는 것을 즐긴다. 그렇다면 네 아비는 그러지 않을 것 같으냐?” 아버지의 이 추궁으로부터 우리는 얼마나 자유로울까. 노인들이 버려지는 게 현실이다. 실제로가 아니라면 심리적으로 버려진다. 눈치를 보고 눈치를 먹으며 살아가는 노인들. 에우리피데스의 비극에 나오는 아들과 아버지는 바로 우리의 모습인지 모른다. 그 아버지의 말처럼 나이가 많아진다고 햇빛을 즐길 권리가 덜해지는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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