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이 되면 음악가들을 선발하는 이런저런 심사 의뢰가 들어온다. 공연에 세울 음악가들, 지원이 필요한 신인 음악가들 등 성격도 목적도 다 다르다. 요청이 오면 되도록 심사에 참여하려고 한다. 나의 일이기도 하거니와 내가 모르고 있던 새로운 음악가를 만날 수 있는 기회이기 때문이다. 때로는 수백 곡의 비슷비슷한 스타일의 음악을 듣다가 귀가 번쩍 뜨이는 새로운 음악가를 만날 때가 있다. 음악 관련 일을 하면서 가장 기쁨을 느끼는 순간이기도 하다. 선정 여부와 관계없이 그 이름들은 나의 메모장으로 옮겨진다. 앞으로 더 관심을 갖고 찾아보겠다는 뜻이다.
최근 성격이 다른 두 심사에서 한 신인 밴드를 만났다. 한 곳에선 최종 선정됐지만, 다른 곳에선 아쉽게 2차 심사에서 탈락했다. 모든 심사위원의 생각이 다 같을 순 없는 것이고, 내가 느낀 매력만큼 다른 심사위원들을 만족시키진 못한 것 같다. 그럴 때는 아직 거친 면이 있지만 나만의 숨어있는 원석을 발견했다고 스스로를 위로한다.
이제 막 경력을 시작하려는 음악가들에게 이야기할 기회가 있을 때 나는 이런 심사에서 떨어져도 크게 실망하거나 좌절하지 말라는 말을 자주 한다. 심사 결과는 결국 심사위원들의 취향이 크게 작용할 수밖에 없고, 만약 나와 비슷한 취향을 가진 심사위원이 한두 명만 더 있었어도 결과는 달라질 게 뻔하기 때문이다. 선정되지 못한 것과 음악이 좋지 않은 건 전혀 다른 차원의 이야기다. 그러니 좌절은 금지다.
하나 더 얘기를 한다면 그 어떤 무대라도 자신들이 갖고 있는 최선을 보여주라는 것이다. 작은 클럽 무대에서 관객 서너 명을 앞에 두고 공연하는 음악가들을 볼 때가 있다. 실망할 수도 있을 것이다. 관객인 나부터도 민망하고 괜스레 미안한 마음이 들 때가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최선을 다해라. 그 세 명의 관객 가운데 한 명이 유명한 페스티벌의 기획자일 수도 있고, 나처럼 일간지에 음악가를 소개하는 사람일 수도 있다.
사설이 길었다. 봄날, 내 마음에 쏙 들어온 밴드는 ‘튜즈데이 비치 클럽’이라는 4인조 신인 밴드다. ‘화요일 해변가 클럽’이란 의미가 모호한 이름을 가진 이 밴드는 올해 활동을 시작해 이제 겨우 노래 두 곡을 발표한 신인 중의 신인이다. 그 두 개의 노래 가운데 하나인 ‘랍스터 킹(Lobster King)’을 듣는 순간 나는 반해버렸다. 도대체 ‘바닷가재 왕’이 무얼 의미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봄에서 여름으로 넘어가려는 해변의 낭만을 이들은 복고적이면서도 몽환적인 사운드로 표현해냈다.
내가 단박에 사랑하게 된 이 노래는 아쉽게 심사의 벽을 넘어서진 못했다. 그래서 이 노래는 ‘일단은’ 나만의 명곡으로 남게 됐다. 이제는 서로의 역할을 하면 된다. 튜즈데이 비치 클럽은 계속해서 음악을 해나가고, 나는 기회가 생기는 대로 이 젊은 밴드를 지금처럼 소개할 것이다. 언젠가 튜즈데이 비치 클럽이 음악 이미지처럼 대형 여름 페스티벌 무대에 서게 될 때 나는 내 ‘촉’에 만족하며 혼자 흐뭇해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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