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외 마스크 착용이 완화되기 전날, 나는 한국 친구와 내기를 했다. “98%의 사람들은 여전히 마스크를 쓰고 다닐걸?” 내 말을 들은 친구의 대답은 이랬다. “아니야, 그렇게 많지는 않을 거야. 내 생각엔 60% 정도?”
결과는? 우리 둘 다 틀렸다. 다음 날 밖에 나가 보니 한국인 99.9%가 여전히 마스크를 쓰고 있었다. 한 달이 지난 지금, 뉴스에서 듣기로 약 95%가 거리에서 마스크를 쓰고 다닌다고 한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완화가 시작된 날 바로 마스크를 벗었다. 얼마나 오랫동안 그 순간을 기다렸는데. 지난 2년 동안 모든 지침을 철저하게 지키며 살았다. 사람들은 거의 만나지 않았고, 백신도 3차례 모두 맞았으며 매일 다섯 번씩은 손을 씻었다. 물론 마스크도 벗은 적이 없다. 나는 방역수칙을 열심히 지켰기 때문에 실외에서 마스크를 쓰지 않아도 된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아주 기쁘게 이를 따랐다. 하지만 그 이후, 서울의 거리를 걸을 때면 가끔 발가벗은 기분이 든다. 남들이 쳐다보는 것 같지만 크게 신경 쓰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주변에 마스크를 쓴 한국인들을 보면서 궁금해졌다. 혹시 썼다가 벗었다가 반복하는 게 그저 번거로워서 그냥 쓰고 다니는 걸까? 만약 그게 이유라면, 신발 벗는 식당이나 집에 들어갈 때 매일 신발을 벗었다가 또 나갈 땐 신는 것도 번거로워야 할 것 같은데. 하지만 내가 듣고서 가장 이해가 가지 않았던 이유는 ‘다른 사람들이 다 쓰고 다니길래’라는 것이었다. 이건 정말 도무지 잘 이해가 가지 않는다. 다만 이 문장을 통해, 한국이 가지고 있는 사회적 속성과 그 압박감을 가장 깊이 이해할 수 있다. 다른 사람이 한다면, 나도 그렇게 해야 하는 것이다. 다들 그렇게 학교에 진학하고, 다들 그렇게 결혼하며, 다들 그렇게 일한다.
지금으로선 인구의 약 5%만이 실외에서의 감염 위험이 현저히 낮으므로 마스크를 쓰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을 이해하고서 받아들인 것처럼 보인다. 정치인이 표를 얻기 위해 한 말도 아니고, 종교 지도자가 그리 믿으라고 한 것도 아니다. 지난 2년 동안, 팬데믹 속에서 한국이 성공적으로 수행했던 방역정책이 그대로 이어지며 여기까지 왔기 때문이다. 길을 걸을 땐 혹시 몰라 손목에 마스크를 걸고 다니는데, 대중교통을 탈 때나 가게 같은 곳에 들어갈 때 다시 썼다가 벗는 건 전혀 번거롭거나 귀찮지 않다. 오히려 거리에선 마스크를 쓰고 다니던 사람들이 식당이나 커피숍, 술집에 들어가면 모두 마스크를 벗고 먹고 마시는 모습이 훨씬 더 흥미롭다.
가끔 남산에 산책하러 올라가는데 그곳에서 아주 간간이 마주치는 사람들은 대개 마스크를 쓰고 있다. 인적이 드문 산에 올라가서도 신선한 숲속의 공기를 맡지 않고 코와 입을 가리는 게 나로선 잘 이해가 가지 않는다. 너무 상투적으로 들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상투적이라는 것은 인간적이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몇 년 전 보고타에서 길을 걷다가 한 여자와 스쳤는데, 그 사람에게서 익숙한 향을 맡았다. 나는 곧바로, 그 향이 나의 어머니가 오랫동안 써 왔던 향수의 향과 똑같다는 걸 깨달았다. 순간, 어머니와 관련된 기억들이 머릿속에 무수히 등장했다. 길에서 나의 코를 스쳤던 순간의 옅은 향기 덕분에 말이다. 식당이 즐비한 한국의 거리를 지날 때마다 코를 찌르는 고소한 삼겹살 냄새를 제대로 즐기지 못하는 것도 유쾌하지 않다. 이뿐만이 아니다. 뺨에 스치는 봄바람만큼 기분을 좋게 하는 게 있는가? 얼마나 상투적인 표현인지는 알지만, 이런 일상이야말로 우리가 팬데믹을 겪으면서 가장 잃고 싶지 않았던 것인데. 이제 드디어 거리에서 마스크를 벗고 초여름의 바람을 만끽할 수 있는데 왜 그렇게 하지 않을까? 마스크를 쓰는 게 그냥 익숙해져서? 모두가 그렇게 하니 나도 그저 언제까지고 마스크를 쓰고 다니는 게 일상이 되는 세상에선, 백현진이 부른 ‘모과’의 가사는 아무도 이해하지 못하게 될 것 같다. “그때 모과 냄새가 소리 없이 흐르네 / 그 냄새는 점점 강해지더니 / 모과 냄새 서서히 진동을 하네 / 그러더니 온 사방에 모과 냄새 퍼지네 / 모과 냄새 그 냄새에 온통 맛이 가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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