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년 전 미국 미시간주 디트로이트 미술관에서 포드자동차 기자간담회를 취재한 적이 있다. 앨런 멀럴리 포드 회장 등 주요 경영진이 참석한 가운데 저녁식사를 겸한 자리였는데 만찬 장소에 놀랐다. 이 미술관의 백미(白眉)인 디에고 리베라(1886∼1957)의 걸작 벽화 ‘디트로이트 산업’(1933년) 바로 앞에 음식 테이블이 차려진 것. 미 연방정부의 국가사적(national historic landmark)으로 지정된 이 작품은 가로 23m, 세로 5m 벽면에 자동차 공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을 사실적으로 그린 대작이다. 1930년대 미국 자동차 산업의 역동성을 보여주는 작품인 만큼 당시 글로벌 금융위기에서 벗어나 옛 위상을 되찾고자 한 포드의 목표와 절묘하게 맞아떨어졌다. 기업 주최 간담회를 많이 다녀봤지만 지금까지도 뇌리에서 잊혀지지 않는 이유다.
만약 국립중앙박물관과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진행 중인 이건희 컬렉션 전시회에서 삼성전자가 이와 비슷한 행사를 치른다고 하면 어떨까. 당장에 “기부만 하면 다냐”며 국립박물관을 특정 기업이 사용하는 데 대한 ‘특혜 비판’이 쇄도할 것이다.
오래전 기억을 장황하게 꺼내든 것은 지난달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린 한미 정상회담 공식 만찬을 놓고 불거진 논란 때문이다. 만찬 사흘 전에야 휴관을 통보해 사전에 예약한 일반 관람객들에게 피해를 끼쳤다는 비판이 나왔다. 일각에서는 1급 국가 유물이 즐비한 국립중앙박물관에서 ‘높으신 분’들이 식사를 즐기는 게 온당하냐는 지적도 있었다. 이에 대해 K팝과 한국 영화의 위상이 세계로 뻗어나가는 요즘 ‘문화 외교’ 차원에서 박물관을 적극 활용해야 한다는 반론도 제기된다.
사실 대통령실의 서울 용산구 이전을 계기로 지척에 있는 국립중앙박물관의 국가 행사 활용은 불가피한 측면이 있다. 국빈 접대에서 장소가 주는 상징성이 작지 않아서다. 예컨대 1945년 2월 얄타회담에서 스탈린이 흑해 연안 크림반도의 차르 여름궁전(리바디아궁)을 회담장으로 고집한 건 제2차 세계대전 승전 후 이곳과 연접한 동유럽 일대를 수중에 넣겠다는 의도를 드러낸 것이었다. 한국 문화의 얼과 정수를 상징하는 국립중앙박물관에서의 외교 만찬은 반만년 고유문화의 소프트파워를 각국 정상들에게 각인시킬 수 있다.
단, 국민들의 관람권 침해를 최소화할 수 있는 묘안이 필요하다. 예컨대 최소 일주일 전 임시휴관을 공지하거나, 가급적 폐관 시간 후 행사를 여는 식의 ‘국립박물관 및 미술관 활용 매뉴얼’을 만들어 대비하는 방안이 있겠다. 국빈 만찬 시 문화재 훼손을 막을 수 있는 범위 내에서 유물들을 정상들의 동선상에 이동 전시하는 방안도 고려할 수 있다. 지난달 한미 정상회담 만찬의 경우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동문으로 입장해 만찬장인 으뜸홀로 이동하는 짧은 시간에 고려 전시실과 신라 전시실을 드나드느라 황남대총 금관 등 서너 점밖에 감상하지 못했다. 일각에서는 관람객 동선과 분리된 별도 행사 공간을 박물관 경내에 두자는 아이디어도 나온다. 문화재는 성물(聖物)이라는 고리타분한 생각에서 벗어나 합리적인 활용 방안을 찾아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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