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이 속한 세계, 그 너머에 대한 상상력[2030세상/김지영]

  • 동아일보
  • 입력 2022년 6월 7일 03시 00분


김지영 스타트업 투자심사역(VC)·작가
김지영 스타트업 투자심사역(VC)·작가
“야, 이 사람 완전 너 같아.” 얼마 전 한 예능을 보고 친구들이 연락을 해왔다. 아나운서 겸 작사가로 활동 중인 김수지 아나운서였다. “에이 무슨.” 겸손한 척 손사래를 치고 입꼬리를 씰룩이며 영상을 찾아보았다. “너무 아름다우신데?” “아, 얼굴 말고.”

두 개의 직업에 기댄 존재 방식이 비슷했다. 인터뷰 군데군데, 내 일기장을 들킨 것처럼 공감 가는 지점이 많았다. 그는 끊임없는 비교와 자존감 저하로부터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마음을 분산시킬 또 하나의 길을 찾았다고 한다. 그게 바로 어릴 적 꿈이었던 ‘작사가’였고, 이제 그에게 작사란 ‘자존감을 지켜주는 방패이자 두 세계를 지탱해 주는 힘’이다.

나 또한 스스로를 정의할 때 두 직업을 함께 나열하기를 선호한다. 소위 ‘본캐’, ‘부캐’로 구분하던 시절도 있었지만 둘 중 어느 것도 ‘부’라 칭할 수 없는 삶의 일부가 된 지금은 그 경계가 모호하다. 애로사항도 있다. 산업 리포트나 재무제표를 보다 에세이 원고를 쓰려 창을 띄우면 머릿속이 하얘진다. 쓰고 지우고를 반복하다 책 몇 권으로 워밍업을 하고 나서야 잠들어 있던 우뇌가 제 기능을 시작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개의 자아를 운용하는 데 있어서의 장점은 명확하다. 일이 고될 땐 시집으로, 글이 버거울 땐 리포트로 숨어든다. 때로는 평가하지 않는 넉넉한 문장으로부터, 때로는 앞뒤가 같은 정확한 숫자로부터 그때그때 필요한 위로를 받는다. 뭣보다 든든한 것은 하나의 세계가 흔들릴지라도 또 다른 세계가 떠받치고 있다는 점이다. 어느 한쪽에서의 성과가 실망스럽더라도 다른 한쪽이 받치고 있는 이상 크게 낙담하지 않는다.

물론 간혹 일도 글도 안 풀릴 때가 있으나 생각보다 나쁘지 않다. 뜬금없지만 학교폭력이 무서운 이유는, 그땐 학교가 세상의 전부라는 점 때문이다. 교실 너머의 세상을 상상할 수 없기에 학교생활이 무너지면 존재가 무너진다. 세계가 분화되어 있다는 것은 단순히 속한 세계가 두 개임을 뜻하지 않는다. 제3, 제4의 세계에 대한 ‘상상력’을 지닐 수 있다는 것이다. 지금 발 디딘 세계가 무너지더라도 그 다음을 기약할 수 있는 ‘효능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다중 자아’의 가장 큰 효용은 여기에 있다. 아마, 모르긴 몰라도 김수지 아나운서도 마음이 동하지 않는 어느 날엔 제3, 제4의 자신을 기껍게 상상하고 찾아 나설 것이다.

요컨대, 속한 세계 너머에 대한 상상력. 직업의 개수가 도움은 될 수 있으나 절대적이진 않다. 그보다 중요한 것은, 스스로를 둘러싼 관계, 역할, 고민으로부터 거리를 두고 저만치 앞서가 5년, 10년 뒤의 눈으로 지금의 나를 보고 그 협소함을 알아채는 일이다. 그때 그 교실이 세상의 전부가 아니었듯, 지금 그 일이 당신 세상의 전부가 아니다. 그땐 몰랐지만, 학교생활이 무너진다고 존재가 무너지는 것이 아니었듯, 지금 이 관계가 무너진다고 당신 존재가 무너지는 것은 아니다. 어쩌면 ‘직장인 부업’을 검색하기 전, 정작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오래된 교실을 벗어나는 이 작은 주문일지도 모르겠다.
#두 개의 자아#상상력#본캐#부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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