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가 상승에 따른 사우디아라비아의 일확천금 중 일부는 결국 ‘네옴(NEOM) 스마트 시티’ 건설 쪽으로 갈 가능성이 높다.” 1일 블룸버그통신은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국제유가가 배럴당 120달러를 넘나드는 고유가로 수혜를 본 사우디가 네옴 스마트 시티에 전 세계에서 규모가 가장 큰 약 500m 높이의 빌딩 건설을 추진하고 있다고 전했다. 2017년 발표된 신도시 건설 프로젝트인 네옴 개발에 5000억 달러(약 627조 원)가 투입된다. 최근 고유가 상황이 도시 건설에 탄력을 일으키고 있다는 것이다.》
네옴은 세계 최대 산유국 사우디를 실질적으로 통치하고 있는 무함마드 빈 살만 왕세자(37)가 핵심적으로 추진하는 사업으로 꼽힌다. 고유가가 무함마드 왕세자의 통치 성과에 직접 도움을 주고 있는 셈이다. 올 1분기(1∼3월) 경제성장률이 9.9%에 이르는 수혜를 본 사우디의 최근 경제 상황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고유가 수혜자 사우디
무함마드 왕세자는 이달 21일로 ‘왕세자(crown prince)’에 오른 지 5주년을 맞는다. 2015년 부친 살만 국왕(87)의 즉위와 함께 국방장관에 오른 그는 2년 후 원래 왕위 후계자였던 사촌형 무함마드 빈 나이프 전 왕세자(63)를 밀어내고 실권자가 됐다.
고령의 부친을 대신해 무소불위 권력을 휘두른 그는 뭐든 맘대로 다 한다는 뜻의 ‘미스터 에브리싱(Mr. Everything)’으로 유명하다. 특히 2018년 10월 터키 이스탄불의 사우디영사관에서 반체제 언론인 자말 카슈끄지가 살해된 사건은 그의 전횡에 한계가 없음을 보여줬다. 사우디 측의 부인에도 미국 정보당국은 사건 배후에 그가 있다는 결론을 내렸고 그의 이미지 또한 ‘전제 군주’ ‘냉혹한 암살자’ 등으로 굳어졌다.
이후 국제사회는 그와 거리를 뒀다. 특히 인권을 중시하는 조 바이든 미 대통령은 대선 후보 시절부터 “더 이상 사우디에 무기를 팔지 않겠다. 그들을 국제적 ‘왕따(pariah)’로 만들겠다”며 무함마드 왕세자와 사우디를 직설적으로 비판했다. 취임 후에는 “미 대통령의 카운터파트는 국왕”이라며 왕세자는 자신의 상대가 아니라고 했다.
최근 무함마드 왕세자는 자신을 냉대했던 바이든 대통령은 물론이고 터키 프랑스 러시아 이스라엘 등으로부터 ‘러브콜’을 받고 있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후 국제유가가 치솟으면서 산유국 사우디의 몸값이 높아진 결과다.
바이든 대통령이 조만간 사우디를 직접 찾아 그에게 증산을 요청할 것이며 무함마드 왕세자 또한 카슈끄지 사건 이후 4년 만에 터키 그리스 등 해외 순방에 나설 것이란 보도도 잇따른다. 특히 사우디와 이스라엘이 공동의 적 ‘이란’을 견제하기 위해 손을 잡으면서 무함마드 왕세자의 일거수일투족이 중동을 넘어 국제 정세에도 상당한 파장을 불러올 것이란 분석이 나온다.
‘인권’보다 ‘경제’
최근 바이든 대통령은 사우디에 눈에 띄게 공을 들이고 있다. 그는 3일 “중동에 더 많은 안정과 평화를 가져올 방법을 연구하고 있다”며 조만간 이스라엘과 일부 아랍국을 방문할 것이고 사우디도 포함될 가능성이 있다고 밝혔다.
바이든 대통령은 예멘 내전의 당사자들이 최근 두 달간 휴전을 하기로 결정한 것을 두고 “사우디가 용기 있는 리더십을 보여줬다”고 치하했다. ‘수니파 맹주’를 자처하는 무함마드 왕세자는 즉위 직후 예멘 내전에 개입했고 정부군을 전폭 지원하고 있다. 이란의 지원을 받는 시아파 후티 반군을 저지하는 것이 사우디 이익에 부합한다는 이유에서다.
집권 민주당의 중진 애덤 시프 하원 정보위원장이 “미 대통령이 무함마드 왕세자와 만나면 안 된다. 그는 카슈끄지를 가장 끔찍하고 계획적인 방식으로 제거한 사람”이라고 반발하는데도 바이든 대통령이 사우디행을 추진하는 이유로 고유가로 인한 지지율 하락이 꼽힌다. 미 여론조사업체 ‘파이브서티에이트’에 따르면 3일로 취임 500일을 맞은 바이든 대통령에 대한 긍정 평가는 40.8%에 불과했다. 그는 1977년 이후 45년 만에 지지율 최저치를 기록한 미 대통령이다.
터키-佛-러도 구애
다른 나라의 구애도 한창이다. 카슈끄지 사건 당시 터키는 자국 영토 내 살인이 일종의 주권 침해라며 거센 불만을 표했다. 사건 관련자 26명을 붙잡아 재판도 했다.
터키는 올해 4월 초 돌연 재판을 중단하고 사건을 사우디 법원에 넘기기로 했다고 밝혔다.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터키 대통령은 같은 달 28일 사우디 2대 도시 지다를 찾아 살만 국왕과 무함마드 왕세자 부자를 만났다. 에르도안 대통령은 지다로 출발하기 전 “이번 방문을 통해 에너지, 식량안보, 방위, 금융 등의 협력을 기대한다”고 했다.
에르도안 정권은 금리 인상이 경제에 나쁜 영향을 준다며 고물가에도 거듭 금리 인상에 부정적인 태도를 취해 왔다. 이로 인해 터키 리라화 가치가 사상 최저치를 경신하고 4월 물가 상승률이 68%로 치솟자 내년 대선을 앞둔 에르도안 대통령의 위기감이 커졌다. 카슈끄지 사건 후 사우디가 비공식적으로 터키산 물품 수입을 중단하면서 터키의 대사우디 수출 또한 90% 급감했다. 이런 경제적 어려움을 무함마드 왕세자와의 관계 개선으로 타개하려 한다는 분석이 나왔다.
우크라이나 침공 후 국제사회의 강도 높은 제재를 받고 있는 러시아 또한 지난달 31일 세르게이 라브로프 외교장관을 사우디로 보내 협력 방안을 논의했다. 지난해 12월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 또한 지다에서 무함마드 왕세자를 만났다. 마크롱 대통령은 카슈끄지 사건 이후 사우디를 찾은 최초의 서방 지도자다.
독재자 이미지는 부담
무함마드 왕세자가 국제사회의 전면에 다시 나서더라도 이미 굳어진 독재자 이미지를 쉽게 잠재울지는 미지수다. 카슈끄지 사건 이전에도 그는 노골적인 정적 제거로 악명이 높았다. 그는 왕세자에 오른 지 5개월 만인 2017년 11월 자신에게 비판적인 왕족 등 반대파 500여 명을 부패 혐의로 수도 리야드의 한 호텔에 감금한 뒤 재산 포기 각서 작성 등을 종용했다.
무함마드 왕세자 역시 탈석유, 산업 다각화, 여성 인권 향상 등을 통해 국내외의 부정적 여론을 누그러뜨릴 것이란 분석이 나온다. 그는 집권 후 여성의 운전 및 해외여행 등을 허용했고 “여성과 남성의 차이는 없다”는 뜻을 강조했다. 영국 가디언 인터뷰에서는 “사우디를 ‘온건한 이슬람’으로 되돌려 놓겠다”며 이슬람 극단주의와도 선을 그었다.
3400만 명 인구의 70%가 30대 이하인 젊은 나라 사우디의 특성 또한 그에게 유리한 환경을 조성하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마이클 모렐 전 미 중앙정보국(CIA) 부국장은 CBS에서 “사우디 왕실 내에는 무함마드 왕세자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 많지만 젊은이들은 그를 지지한다”고 진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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