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제 목숨 내건 ‘데스 매치’에서 글로벌 스포츠가 된 축구[강인욱 세상만사의 기원]

  • 동아일보
  • 입력 2022년 6월 10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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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인욱 경희대 사학과 교수
강인욱 경희대 사학과 교수
《세계인을 하나로 묶는 대표 스포츠로 통하는 축구. 사실 그 역사는 의외로 짧아서 본격적인 룰이 등장한 것은 약 150년밖에 되지 않는다. 하지만 둥근 공을 차는 놀이는 인류의 문명이 등장한 이래 언제나 있어 왔다. 공놀이의 시작은 아시아도 세계 어느 곳에 결코 뒤지지 않는다. 유라시아를 통해 전파된 축구의 기원은 어떨까. 신을 위한 인신공양의 제사, 그리고 폭력이 난무하는 난장판을 거쳐 세계인의 축제로 자리매김한 축구의 역사를 살펴보자.》

강인한 전사의 상징 ‘격구’

고대 마야에서는 상대 골대에 골을 넣는 경기를 겨뤄 패배한 팀원들을 신에게 제물로 바쳤다. 중남미에서 발견된 1500개 공놀이 
경기장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큰 치첸이트사 유적으로 길이 96m, 너비 30m나 된다. 사진 출처 위키피디아
고대 마야에서는 상대 골대에 골을 넣는 경기를 겨뤄 패배한 팀원들을 신에게 제물로 바쳤다. 중남미에서 발견된 1500개 공놀이 경기장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큰 치첸이트사 유적으로 길이 96m, 너비 30m나 된다. 사진 출처 위키피디아
고고학이 전하는 세계 최초의 공놀이는 이집트에서 시작됐다. 마야 문명에서는 팀을 나눠 운동장 벽에 달린 골대에 공을 넣는 경기를 겨뤄서 패배한 팀원들을 인신공양(제사 때 산 사람을 신에게 바치는 것)하는 풍습도 있었다. 배수의 진을 치고 싸우는 ‘데스 매치’가 결코 수사적인 표현이 아닌 셈이다. 마야에서 공은 태양을 상징하고, 공을 주고받는 행위는 빛과 어둠의 세계를 넘나드는 것으로 생각한다고 한다. 지금까지 중남미에서 1500개가 넘는 공놀이 경기장이 발견됐고, 가장 큰 치첸이트사 유적의 크기는 길이 96m, 너비 30m에 달한다. 지금의 축구장과 견줘도 손색이 없는 규모다.

또 다른 공놀이의 발상지는 바로 유라시아 초원이다. 드넓은 초원에서 목축을 하는 이들에게 공놀이는 자연스러울 수밖에 없다. 처음에는 동물의 오줌보를 차고 놀다가 후에는 내구성이 있는 가죽으로 공을 만들어서 말 위에서 공을 두고 겨루는 경기로 발전했다. ‘격구’라고 불리는 마상 경기는 중국은 물론이고 한국과 일본에서도 널리 유행했다.

중국 신장위구르자치구 산산현 양하이의 약 3200년 전 무덤에서 출토된 공(위쪽 사진)과 스틱. 공의 속은 동물 털로 채워 넣고 겉은 가죽으로 감쌌다. 사진 출처 파트리크 베르트만의 논문·강인욱 제공
중국 신장위구르자치구 산산현 양하이의 약 3200년 전 무덤에서 출토된 공(위쪽 사진)과 스틱. 공의 속은 동물 털로 채워 넣고 겉은 가죽으로 감쌌다. 사진 출처 파트리크 베르트만의 논문·강인욱 제공
최근까지 페르시아에서 기원한 줄 알았던 마상 경기가 사실 실크로드에서 시작됐다는 것이 밝혀졌다. 중국 신장위구르자치구 산산현 양하이의 약 3200년 전 유목민 무덤을 발굴했는데, 무덤에서 다양한 마구(말을 타는 도구)와 함께 공이 4개나 발견됐다. 심지어 지금 사용해도 손색이 없을 듯한 스틱도 함께 나왔다.

이 공들의 속은 동물 털로 채워 넣고 겉은 가죽으로 감쌌다. 표면에는 붉은 줄을 감아뒀다. 실크로드 최초의 공놀이가 어떤 규칙을 따랐는지는 확인할 수 없다. 다만, 해당 무덤의 주인공들은 20대에서 40대 초반의 사람들로, 미라가 된 팔뚝에는 문신이 그득했다. 이들은 아마 자신만의 문신을 뽐내며 드넓은 초원을 누볐을 것이다.

유목민들의 공놀이는 이후 서양의 폴로, 동양의 격구로 그 명맥을 이었다. 하지만 고대의 공은 탄성이 좋은 고무공이 아닌 가죽으로 돼 있었고 스틱도 40cm 정도로 매우 짧았다. 이 때문에 말을 타면서 거의 땅바닥에 닿을 정도로 엎드려 볼을 드리블해야만 했다. 마상 경기를 즐기려면 기예에 가까운 수준의 기마술을 갖춰야 했던 것이다. 조선시대 무과 과거에서도 격구는 최고로 어려운 관문으로 통했다. 3000년 전 실크로드에서 시작된 마상 공놀이는 바로 강인한 전사의 상징이었던 것이다.

김유신과 김춘추가 즐긴 ‘축국’


현대 축구와 가장 유사한 모습인 축국(蹴鞠)은 기원전 4세기∼기원전 3세기경에 중국에서 처음 등장했다. 당시 초원지역으로부터 기마술과 함께 마상 공놀이도 전파됐지만, 기마가 익숙하지 않은 중국에서 즐기기엔 적합하지 않았다. 축국은 네모난 경기장에 동그란 공을 차면서 ‘천원지방(天圓地方)’이라는 철학을 구현했다고 하며, 엄정하게 심판을 볼 것을 맹세한 심판관의 ‘축국의 맹세’도 남아 있다. 이 축국에 대한 애호가 얼마나 지극했는지 약 2200년 전의 항처(項處)라는 사람은 탈장이 되어 몸을 쉬라는 순우의라는 명의의 충고를 무시하고 무리하게 축국을 하다가 죽었다고 한다. 이렇듯 공차기에 대한 사랑이 수천 년을 잇는 중국이지만 오늘날 국제무대 성적은 신통치 않으니, 기원지라고 꼭 잘하는 것은 아닌 것 같다.

이후 축국은 발해와 신라, 그리고 일본에도 널리 퍼졌다. 한국에서도 김유신이 김춘추와 축국을 즐기다 문희와 결혼하게 된 에피소드가 유명하다. 하지만 고려와 조선으로 들어오면서 축국은 더 이상 널리 인기를 얻지 못한다. 마상 공놀이인 격구가 무과의 필수 과목이었던 것과 비교된다. 아마도 축국은 몸끼리 부딪치고 다툼이 많은 놀이라 성리학 사회에서는 별로 장려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민간에서는 축국 대신에 편을 갈라서 돌을 던지며 싸우는 석전이 유행하며 사람 간의 긴장을 적절히 해소하는 역할을 했다.

현대 축구는 영국에서 시작되었지만, 사실 그 시작은 전쟁과 폭력성으로 점철되어 있다. 영국의 킹스턴온템스와 체스터 지역에서는 전쟁 중 베어버린 덴마크 왕자의 머리로 게임을 했다는 전설이 있다. 또 중국에서도 황제가 치우와 전쟁을 하고 잘려나간 치우의 머리를 차면서 기념했다고 전해진다.

영국에서도 근대적인 축구가 만들어지기 전에 공을 두고 마을끼리 집단적으로 난투극을 벌이곤 했다. 공을 둘러싸고 서로 접촉하면서 제대로 된 규칙마저 없다면 서로 폭력적이 되는 것은 자명하다. 사실상 놀이를 통해 폭력성을 해소하였고, 살인만 하지 않을 뿐 상대방에게 폭력을 가하는 것이 용인되었다. 이렇듯 중세 이후 공놀이는 바로 상대방에 대한 파괴 본능을 해소하기 위해서 만들어졌다. 군사들에게는 전쟁의 기술과 체력을 증진시키기 위한 목적도 있었다. 하지만 폭력성을 적절히 조절할 수 없었기 때문에 축구는 스포츠가 아니라 난장판에 가까웠다.

지금도 영국의 축구 하면 떠오르는 것은 거친 훌리건이기도 하다. 훌리건들의 만행은 도저히 21세기의 상식으로 이해할 수 없을 정도이다. 영국에서는 100명 가까운 사람이 훌리건의 난동으로 맞아죽은 헤이절 구장 사건(실제는 벨기에에서 벌어짐), 56명이 사망한 브래드퍼드 사건 등이 대낮의 경기장에서 벌어졌다.

인간의 파괴 본능 해소


폭력성에도 불구하고 축구가 세계의 스포츠가 될 수 있었던 이유는 제사장이나 말 위의 전사만이 할 수 있었던 고대의 경기에서 환골탈태했기 때문이다. 지금의 축구는 별다른 시설 없이 공 하나만 있으면 할 수 있다. 규칙도 오프사이드를 제외하면 누구나 쉽게 금방 이해한다. 여기에 20세기 이후 계속된 전쟁의 여파도 있었다. 다행히 지금은 훌리건을 엄격하게 막고 관객들의 안전을 높이며 오히려 인간의 파괴 본능을 효과적으로 해소하면서 세계적인 스포츠가 되었다. 폭력적인 스포츠였지만 이제는 전쟁과 인간 간의 갈등을 합법적으로 해소할 수 있도록 발달되어 왔기 때문이다.

차범근, 박지성에서 손흥민으로 이어지는 우리의 세계적인 축구 스타, 그리고 훌리건 없이 흥겨운 축제로 끝난 2002년 월드컵에 이어 손흥민의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EPL) 득점왕까지 우리의 축구가 세계로 퍼지고 있다. 국가와 집단 간의 갈등이 극한으로 치닫는 지금, 전쟁 대신 스포츠로 서로에 대한 긴장을 누그러뜨리는 축구와 같은 축제가 그 어느 때보다 더 많이 필요하다.

#고대 마야#데스 매치#축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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