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식 전문가 A 씨는 2011년 10월 4일 한 증권전문방송에서 안랩(당시 안철수연구소) 주식을 추천했다. 지수가 출렁거리는 변동성 장세인 만큼 사려는 사람이 많고 테마가 있는 종목이 좋다는 그럴듯한 근거를 댔다. 많은 개미 투자자가 그 말을 믿었지만 사실 A 씨는 방송 전 안랩 주식 31억 원어치를 사둔 상태였다. 이후 주가가 급등하면서 약 보름 만에 23억 원이 넘는 차익을 챙겼다.
▷이처럼 전문가가 특정 주식을 일반인에게 추천하기 직전 산 다음 주가가 오를 때 빠르게 팔아 이익을 챙기는 것을 ‘스캘핑(scalping·가죽 벗기기)’이라고 한다. 이 말은 미국 원주민들이 전쟁 중 적의 시체에서 머리 가죽을 벗겨 전리품으로 챙긴 데서 유래했다. 증시에서는 사람 피부 중 작은 부분을 차지하는 머리 쪽 피부를 벗겨내듯 단타 매매로 ‘작은 이익’을 얻는다는 의미로도 쓰인다. 다만 A 씨는 작은 이익이라고 하기에는 엄청난 돈을 벌었다.
▷‘증시 김선달’로 불리던 A 씨는 2017년 대법원에서 유죄 취지의 판결을 받은 뒤 서울고법 파기 환송심에서 무죄를 받았다. 당시 재판부는 방송 중 A 씨의 행동을 매수 추천으로 볼 수 없는 만큼 스캘핑 범죄에도 해당하지 않는다고 봤다. 하지만 대법원은 이달 12일 A 씨에 대해 다시 유죄 판결을 내렸다. 특정 증권이 매수하기에 적합하다고 소개하는 행동 자체가 매수 추천이라고 봤다. 방송 전 미리 산 주식을 방송 후 팔 가능성을 알리지 않은 것이 법에서 금지한 ‘부정한 계획과 기교’에 해당한다는 것이다.
▷법적으로 문제 되는 스캘핑은 아니지만 주주가치를 보호해야 할 경영진이 대형 호재에 맞춰 주식을 팔아 신뢰를 저버리는 일도 생기고 있다. 카카오페이 임원들이 작년 말 코스피200 편입 직전 스톡옵션을 행사해 얻은 주식을 시간 외 매매로 팔아치운 것이 대표적인 예다. 국민주를 표방하면서 개미 투자자를 끌어들여 임원은 대박을 터뜨렸지만 주가가 공모가 아래로 떨어지며 정작 개미는 쪽박을 찬 경우가 적지 않다.
▷경제가 불안할수록 사람들은 ‘10년 이상 보유하지 않는다면 단 10분도 투자하지 말라’는 워런 버핏의 장기 투자 원칙에서 멀어진다. 그 대신 기업 가치와는 무관한 ‘차익 따먹기’ 같은 도박성 투자에 몰두하는 경향이 두드러진다. 전문가들의 스캘핑은 사람들의 조급증을 키워 자신들의 이익을 챙기려는 기만행위다. 11년 전 ‘증시 김선달’ 문제는 개인들의 지적으로 수면 위로 떠올랐다. 지금 얼마나 많은 증권방송과 인터넷 유료 서비스에서 불법적 스캘핑이 진행 중인지 모를 일이다. 가짜 전문가를 솎아내지 않고는 자본시장에 드리운 불신도 걷어낼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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