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권자 행동을 설명하는 가장 중요한 개념은 특정 정당 지지자로서의 정체성을 의미하는 ‘정당일체감’이다. 정치학의 고전인 ‘미국 유권자(The American Voter)’에 따르면 정당일체감은 꽤 이른 나이에 형성되며 한번 형성되면 평생 일관되게 유지되는 경향이 있다. ‘콘크리트 지지층’이 존재할 수 있다는 얘기다.
그러나 정당일체감이 실제로 절대 불변일까? 우리보다 정당의 역사가 훨씬 긴 미국에서도 정당일체감의 ‘불변성’에 대한 논란은 계속 있었다. 미국 노스캐롤라이나대 마이클 매큐언 교수와 그의 동료들은 정당 지지율은 영구불변이 아니며 대통령 지지율 등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변한다고 주장한 바 있다. 또 ‘히피 세대’로 대표되는 1960, 70년대 급격한 진보화로 민주당이 영원히 집권할 것 같았던 미국도 지금까지 한 정당의 일방 독주는 나타나지 않고 있다.
한국은 어떨까? 2012년부터 지난주까지 한국갤럽이 매주 발표한 정당 지지율을 취합해 살펴보았다. 지난 10년간의 정당 지지율을 살펴보면 과연 절대 불변의 정당일체감을 가진 유권자가 얼마나 되는지 의문이 든다.
우선 10년 사이 두 정당의 지지율은 큰 변화폭을 보였다. 현재 야당인 더불어민주당의 경우 10년 사이 최저점(15%·2014년 4월 2주 차)과 최고점(56%·2018년 6월 2주 차) 간의 차이가 무려 41%포인트에 달했다. 이제 여당이 된 국민의힘도 최저점(7%·2017년 6월 5주 차)과 최고점(45%·2022년 5월 2주 차) 간 차이가 38%포인트였다. 해당 정당이 인기가 없을 때는 지지자들의 여론조사 참여율도 낮을 테니 해석의 여지가 있긴 하나 산술적으로는 무려 40%의 유권자가 ‘일체감’을 철회했다는 얘기다.
더구나 지지율이 하락할 때는 무서운 기세로 떨어졌다. 현재 국민의힘인 보수당 지지율은 2012년 3월 이후 2016년 ‘태블릿PC’ 논란 때까지 거의 5년간 단 한 번도 민주당에 뒤진 적이 없었고 차이가 26%포인트(2013년 9월 4주 차)까지 벌어지기도 했다. 그러나 2016년 3월 3주 차(41%) 마지막으로 40%대를 기록한 후 4월 4주 차 30%로 하락하는 데 걸린 시간은 불과 한 달이었다. 2016년 총선 당시 ‘친박(친박근혜)’과 ‘비박(비박근혜)’ 간 공천 갈등의 여파였다. 그리고 넉 달 후 지지율은 10%대로 추락해 민주당에 역전됐다.
반면 양 정당 모두 한번 추락한 지지율을 끌어올리는 데는 오랜 인고의 세월이 필요했다. 2012년 대선을 앞두고 ‘친노(친노무현)’-‘비노(비노무현)’ 간 갈등으로 민주당 지지율은 20%대 지지율에 머물렀고 ‘태블릿PC’ 논란(2016년 10월 3주 차) 이전까지 무려 244주간 단 한 번도 보수당에 앞서지 못했다.
마찬가지로 국민의힘이 한번 추락한 지지율을 회복해 재역전(2021년 7월 2주 차)하는 데까지 걸린 시간도 무려 245주다. 이 기간 동안 무려 190주 연속 10%대 지지율을 기록했고 10% 미만을 기록한 것도 13주나 됐다. 한때 민주당에 43%포인트까지 뒤지기도 했고 2018년 8월 한 달간은 정의당에도 뒤졌다.
현재 여야 모두 집안싸움이 점입가경이다. 국민의힘은 연일 ‘친윤(친윤석열)’과 당 대표 간의 설전이 이어지고 있다. 당 대표의 징계위원회도 앞두고 있다. 민주당은 당 대표를 선출하는 전당대회를 앞두고 ‘친명(친이재명)’과 ‘반명(반이재명)’ 간 공방이 심상치 않다. 선거를 이긴 쪽과 진 쪽 모두 당내 주도권을 차지하기 위한 내분이 심화되는 양상이다.
역설적이지만 정당일체감의 ‘불변성’은 정당들에 독이 되어 왔다. ‘콘크리트 지지층’을 과신하다 보니 자신들의 우위가 영원하리란 착각의 늪에 빠져 계파싸움에 몰입했다. 지금도 여당은 지난 두 번 선거의 승리, 야당은 박근혜 대통령 탄핵 이후 5년간 빠져 있던 ‘승리감’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는 듯하다. 그러나 그리 오래되지 않은 ‘굴욕의 역사’를 잊는 정당은 또다시 혹독한 250주를 보내게 될 수 있다. 지지층의 변심은 조용히, 그리고 갑자기 찾아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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