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은 재임 중 멕시코와의 국경에 장벽 설치, 중국산 제품에 대한 관세 폭탄 등 민감한 현안들을 행정명령(executive order)으로 밀어붙였다. 행정명령은 한국으로 치면 대통령령(시행령)과 비슷한데, 트럼프는 재임 기간 중 1년에 55건꼴로 행정명령을 쏟아냈다.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이 한 해 평균 35건, 조지 W 부시 전 대통령이 37건의 행정명령을 내린 것에 비해 훨씬 많다.
이는 트럼프의 조급한 성격 때문에 벌어진 일만은 아니다. 하원을 야당 민주당이 장악한 상황에서 본인이 원하는 입법이 여의치 않자 행정명령을 남발한 것이다. 일부 이슬람 국가 출신 시민들의 입국을 제한하는 반(反)이민 정책이 대표적 사례다. 민주당이 이민법 개정에 반대하자 트럼프는 수차례 행정명령을 통해 강행했다. 이에 민주당에서는 입국 제한과 관련해서는 대통령의 권한을 제한하는 법안까지 발의했다.
대통령제 국가에서는 특히 국회가 여소야대일 때 행정부와 입법부가 충돌할 지점이 많아진다. 국회가 입법권이라는 무기를 손에 쥐고 정부를 견제하려 하면 정부는 시행령 제정으로 맞선다. 법의 체계상으로는 시행령이 법률의 하위 개념이지만 실질적 효력에서는 별 차이가 없는 데다 제정 절차가 간단해 더 신속하게 만들 수 있다.
한국에서도 윤석열 정부 들어 시행령을 둘러싼 정부와 국회 간의 갈등이 불거지고 있다. 정부가 시행령을 고쳐 법무부 산하에 인사정보관리단을 설치한 것을 놓고 국회 다수당인 더불어민주당에서 “법에서 위임한 범위를 벗어났다”며 강력 비판하고 있다. 경찰을 행정안전부가 통제하는 방안도 시행령을 통해 추진한다면 야당의 반발이 더욱 커질 것이다.
이에 민주당에서는 국회가 행정부에 시행령의 수정·변경을 요청하면 행정부는 그 결과를 국회에 보고하도록 하는 법안을 내놨다. 시행령까지 국회가 좌지우지하겠다는 취지인데, 법률안에 대한 거부권을 갖고 있는 대통령이 수용할 가능성은 희박하다. ‘시행령에 대한 심사권은 대법원에 있다’는 헌법 조항에 위배된다는 주장도 있다.
국회가 세부적인 내용들까지 모두 법률에 넣음으로써 아예 시행령을 만들 여지를 주지 않는 방법도 있다. 하지만 행정적인 전문성이 필요한 영역까지 일일이 법률에 담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렵다. 법원 판결로 시행령을 무효화시킬 수도 있지만 ‘명령·규칙 또는 처분이 헌법이나 법률에 위반되는지 여부가 재판의 전제가 된 경우’에만 심사하도록 돼 있다.
국회와 법원을 통한 견제에 한계가 있는 이상 정부 스스로 위법 소지가 있는 시행령을 걸러내야 한다. 헌법과 법률에서는 그 핵심 역할을 국무회의에 맡기고 있지만 지금까지 국무회의는 사실상 통과의례에 그쳤다. 장관들이 인사권자인 대통령의 의중에 반하는 의견을 내는 것이 애당초 불가능한 일이라면 굳이 매주 모여 회의를 할 필요가 있나. 국무회의에서 원칙대로 ‘심의’를 해서 시행령안이 부결되는 사례가 종종 나와야 한다.
정부가 비판에 귀를 닫은 채 무리하게 시행령을 제정하면 두고두고 논란의 불씨가 될 수밖에 없다. 소모적인 정쟁이 이어지고, 시행령의 적용 대상이 된 사람들은 효력을 놓고 소송을 벌일 가능성이 높다. 정부가 이를 모를 리 없음에도 눈을 감는 것은 근시안적인 판단이다. ‘법 위의 시행령’이 낳은 부작용은 훗날 여론 악화, 국정 동력 약화라는 부메랑으로 정부에 돌아오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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