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예술가라고 모든 말과 행동이 위대한 것은 아니다. 프란츠 카프카의 경우에도 그렇다. 그가 쓴 ‘아버지에게 드리는 편지’나 일기를 보면 그의 아버지는 천박하고 속물적이고 위압적인 폭군으로 묘사된다. 이것을 액면 그대로 믿어야 할까. 아버지는 그가 쓴 글들을 읽지 않았지만 만약 읽었다면 그러한 평가에 동의했을까. 남아프리카공화국 작가 네이딘 고디머의 ‘그의 아버지가 보낸 편지’는 이러한 의문에서 출발한다. 이 소설에서 카프카의 아버지는 지하에서 아들에게 편지를 써서 자신의 입장을 변호한다. 허구지만 일리가 있는 이야기다.
아버지도 할 말이 많다. 그는 악착같이 일을 해서 자수성가한 상인이었다. 하루에 꼬박 열두 시간을 가게에서 일했다. 그 덕에 넉넉하게 살았고 자식들을 좋은 학교에 보낼 수 있었다. 물론 그 과정에서 자신과 달라도 너무 다른 아들에게 상처가 될 잔소리를 하고 엄했던 것은 사실이다. 그렇다고 그를 경멸하고, 그의 침실에서 나오는 성애적인 소리까지 기록하는 것은 아들로서 할 짓은 아니었다. 자신의 소설을 읽어주지 않았다고 불평할 일도 아니었다. 그는 아들의 관념적인 소설을 읽을 수 있을 정도로 지적인 사람이 아니었다. “나는 너와 달리 어렸을 때부터 노예처럼 일을 해야 해서 책을 읽을 시간이 별로 없었다. 나는 어렸을 때 너처럼 책들이 있는 방에 틀어박혀 있을 수 없었다. 그랬다면 굶어죽었을 것이다.” 맞는 말이다. 지적인 예술도 빵이 있어서 가능했던 게 아닌가.
카프카는 “우리 안의 얼어붙은 바다를 내리치는 도끼” 같은 위대한 소설들을 썼을지는 몰라도, 아버지를 경멸스러운 웃음거리로 만들어 버렸다. 그는 예술가로서는 위대했지만 자식으로서는 따뜻함이 부족했다. 고디머가 펼쳐 보이는 카프카 아버지의 상상적인 편지, 그것의 함의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다. 위대하다고 모든 것이 합리화되는 것은 아니다. 상처를 받았다고 상처를 주는 것이 합리화되는 것은 아니다. 특히 부모에게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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