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스타프 말러의 교향곡 5번 시작 부분엔 호른의 네 음표에 이어 지저귀는 듯한 경쾌한 멜로디를 바순이 노래한다. 말러가 그의 초기 가곡집 ‘어린이의 이상한 뿔피리’ 중 ‘높은 지성에의 찬미’라는 노래 전주에서 따온 선율이다. 노래 내용은 이렇다.
노래라면 누구에게도 지지 않는 숲속 뻐꾸기와 나이팅게일이 내기를 했다. 더 멋지게 노래하는 쪽이 이기는 걸로. 누가 심판을 맡을까. 뻐꾸기는 당나귀에게 선택을 맡기자고 했고 나이팅게일도 동의했다. 당나귀는 귀가 크니까 소리를 잘 들을 수 있으리라는 것.
뻐꾸기와 나이팅게일의 노래를 들은 당나귀는 말했다. “나이팅게일의 노래는 어려워. 뻐꾸기는 화음도 좋고 박자도 좋아. 그러니, 내 높은 지성으로써 말한다. 뻐꾸기가 이겼다!”
독일 민요에서 따온 가사이지만 이 노래에는 평론가들을 보는 음악가들의 시선이 반영되어 있다. 작곡가나 연주가들이 보기에 비평가들이란 자신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무시하고 ‘박자가 맞다 틀리다, 음정이 맞다’처럼 말로 표현하기 좋은 것에 집착하는 사람들일지도 모른다. 지휘자이자 작곡가로 이중생활을 했던 말러는 평생 평론가들의 공격에 시달렸고, 특히 그가 살아서 초연을 본 여덟 곡의 교향곡에서 더욱 그랬다.
바그너의 오페라 ‘뉘른베르크의 명가수’에는 베크메서라는 인물이 나온다. 노래경연대회의 심사위원이자 평론가인데, 그의 모토는 ‘틀리면 감점’이다. 감성과 상상력으로 개인의 예술을 펼치는 데는 별 관심이 없다. 결국 그는 직접 노래 실력을 선보이려다 망신을 당한다. 바그너는 자신이 혐오하던 음악평론가 에두아르트 한슬리크의 모습을 베크메서에 투영했다고 알려졌다. 심지어 ‘뉘른베르크의 명가수’ 초고에는 아예 베크메서라는 이름 대신 ‘한슬리크’라고 적었다.
최근 번역 출간된 지휘자 존 마우체리의 책 ‘지휘의 발견’에는 흥미로운 일화가 나온다. 말러 교향곡 4번 1악장 시작 부분은 썰매 방울과 플루트의 단조로운 음형으로 시작되고 여기에 클라리넷과 현악이 가세하면서 제1주제가 시작된다. 썰매 방울과 현악이 만나는 순간은 단지 8분 음표 세 개다. 그런데 말러는 현악과 클라리넷 악보에만 ‘조금씩 느리게’라는 표시를 붙였다. 썰매 방울과 플루트에는 이 지시어가 없다. 말러의 지시를 따르면 썰매 방울(+플루트)과 현악(+클라리넷)의 빠르기가 달라 양쪽이 딱 맞지 않고 어긋나게 되지만 거의 모든 지휘자들은 썰매 방울과 플루트에도 ‘조금씩 느리게’를 적용해 템포를 맞춘다.
지휘자인 저자는 영국 맨체스터 할레 오케스트라를 지휘해 이 곡을 연주하면서 말러의 지시를 따르기로 결정했다. 당연히 살짝 템포가 어긋났고, 다음 날 신문에는 이런 리뷰가 실렸다. “이 곡의 우아한 ‘조금씩 느리게’를 다루는 솜씨를 보면 말러의 음악을 제대로 이해하는지 알 수 있다. 애석하게도 마우체리 씨는….”
과연 평론가는 악보를 제대로 알고 있었을까. 알았다면 전후 맥락을 생략한 채 이런 식으로 단언하기 어렵다. 악보를 잘 알고도 같은 결론을 내렸다면 악보에 쓰인 지시까지 평론에 언급하는 게 맞다. 그러나 이 평론만 읽은 사람들은 악보에 지시된 맥락을 알지 못하고 지휘자에 대해 좋지 못한 인상을 갖게 됐을 것이다.
평론가가 있는 세상과 없는 세상 중 하나를 선택하라면 당연히 ‘있는’ 세상이 바람직할 것이다. 하지만 매달 매주 수많은 신곡과 연주를 접하는 평론가와, 긴 기간 동안 하루 저녁의 레퍼토리에 집중하는 연주가 사이에서 곡의 이해도를 따지면 반드시 평론가가 높은 위치에서 준엄한 선고를 내릴 수 있을지 의문이 들 때도 있다. 글 쓰는 어떤 직업이나 마찬가지이지만, 평론가는 특히 겸허함을 잊어서는 안 되는 일일 것이다.
캐나다의 몬트리올 심포니 오케스트라는 7월 6일 새 음악감독 라파엘 파야레 지휘로 서울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말러 교향곡 5번을 연주한다. 이 악단과 지휘자가 들려줄 명연, 특히 마지막 악장을 기대하며 말러가 평론가들에 대한 씁쓸한 기분을 담았던 가곡 ‘높은 지성에의 찬미’를 다시 한번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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